베를린 장벽이 주는 교훈
베를린 장벽이 주는 교훈
  • 전주일보
  • 승인 2009.11.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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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 국경을 가르는 총 길이 155km의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다가 1989년에 무너지기 까지 냉전시대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이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 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모두 23만 5000명에 달한다.

1964년 10월에는 57명의 동독 사람들이 땅굴을 파서 동쪽으로 넘어왔고, 1979년에는 두 가족이 기구(氣球)를 고 하늘을 날아서 서베를린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 1245명이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가다 사망했고 그 가운데 바로 장벽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 136명이나 된다. 체포된 사람도 6만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평균 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장벽은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동독선전 담당비서의 실언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이도 있다. 기자가 여행제한 조치는 언제 시행되느냐고 묻자 준비가 부족했던 정치국원이 “내가 아는 한 지금부터” 라고 우물거렸고 언론은 즉각 철의 장막이 걷히게 되었다고 흥분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에 목마른 동독주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장벽으로 밀려 든게 된 것이 거대한 사태의 발단이라는 것이다. 작은 우연이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돌려 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역사관은 널리 퍼져 있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이 어떤 운전사의 작은 실수에서 시작됐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운전사가 핸들을 잘못 꺽는 바람에 황태자의 차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고 마침 그 곳에 있던 세르비아 청년이 “운 좋게” 황태자 암살에 성공했고 이 때문에 1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차 대전이 일어났고, 이는 또 3000만명이 쓰러진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역사를 이처럼 단선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일 통일과 냉전체제 종식으로 이어진 대사건이 단지 한사람의 말실수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역사적 격변은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된 변화의 기운이 임계상태에 이르러 어느 순간 폭발한 것으로 봐야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장벽이 갈라 놓은 두 세계의 불균형이 임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냉전으로 갈린 동서 두 진영은 정치적 자유에서 극심한 불균형을 보였다. 경제적 효율성과 삶의 질에서도 격차가 한껏 벌어졌다. 이런 불균형을 지탱하는 장벽은 격변의 위험을 내포한다.

장벽은 단지 불균형이 자라는 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으면 장벽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벽이 무너진 세계는 새로운 불확실성을 낳았다. 승리감에 취한 이들의 오만과 방종은 또 다른 위험을 불러왔다. 핵전쟁과 3차 대전에 대한 불안감과 새로운 형태의 패권 다툼과 지역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역풍을 맞고 있다. 너무 많은 빚을 진 미국과 너무 많은 빛을 준 중국의 갈등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달러가치를 지탱하던 힘이 언제 갑자기 무너질지 알 수 없다. 제대로 된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 조차 없는 상태에서 남북한을 갈라놓은 벽이 무너 질 수 도 있다. 한국은 격변의 시대를 비교적 잘 헤쳐 왔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정치와 경제의 틀을 만들기보다는 그 틀에 맞춰가는 쪽이었다.

이제는 틀을 짜는 자가 돼야 한다. 역사의 격량에 휩쓸리지만 말고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20년 전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다시 생각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고구려대학 외래교수 이 종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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