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 꽃을 심는 마음”
“시심詩心, 꽃을 심는 마음”
  • 전주일보
  • 승인 2024.03.25 15: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상수상詩想隨想 -56

 

시는 서풍에 담겨오는

야윈 바람이다

 

꽃이 남풍에 끌려오는 무언가라면

 

시를 만나

버려도 아깝지 않은, 나를

꽃말을 담아 꽃나무에 걸어두는 날

 

잠시 기억한 뒤 빛 바래는

기념사진 담듯,

봄날 속살에 나를 심는다

 

졸시봄날, 꽃을 심다전문

매년 봄이 오면 종묘상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겨우내 온실에서 가꿔져 꽃망울을 터뜨린 꽃모종들을 보면, 정겨운 사람과 오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기분이 든다. 꼭 꽃을 사들이고 싶어서 종묘상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은 아니다.

아니, 겨울이 언제 물러갔다고 저렇게 벌써 반긴단 말인가!” 꽃들이 아는 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리라. 내심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건네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들어간 김에 이 꽃 저 꽃 들여다보며 인사를 건넬라치면 그냥 돌아서기가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한 포기 두 포기 꽃모종이 손에 들린다.

호사스럽고 값비싼 꽃들만 꽃이 아니다. 앙증맞은 모습, 귀여움이 묻어나는 꽃잎,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신선한 색깔을 입은 봄꽃은 그야말로 새봄의 메신저답다. 찔레장미가 내 손길을 잡아서 한 포기, 팬지가 내 발길을 끌어서 또 한 포기, 무슨 외래종 이름을 달았으나 가을국화를 닮은 휘버유 꽃의 웃음소리가 좋아서 한 포기, 그리고 봄을 지나 여름 내내 피고지면서도 결코 그 잎의 푸름과 꽃빛의 의연함을 잃지 않아서 좋은 페튜니아[사파니아]도 한 포기 장바구니에 담긴다.

그렇대서 드넓은 대지를 갖춘 저택에 살아서 꽃밭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플라스틱 화분이나 사각 트레이에 심어서 길가에 내놓고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며 꽃을 돌보는 일이 매우 즐거운 신선놀음이라는 망상을 즐길 따름이다. 그러면서 몇 년 전 유럽 몇 나라를 돌아보면서 느꼈던 저들이 누리는 생활 속 꽃 사랑을 부러웠던 기억이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출입문 틈새며 창틀, 혹은 담장이나 모퉁이만 있으면 어김없이 꽃을 심고 가꾸던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먼 나라, 이방인의 낯섦이 꽃들로 인하여 매우 친근하고 정겨운 사람이라는 정감이 들었다. 순전히 온 집안에 꽃을 가꾸며 즐기는 저들의 생활모습에서 온 느낌이었다.

하긴 그것만은 아니다. 시골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보다 먼저 나를 꽃집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시골집도 잃고, 넓은 마당과 텃밭을 둘러싼 울타리도 잃은 도시유랑민으로 자라면서 봄날은 또 하나 이룰 수 없는 그리움이 되었을 것이다. 행랑채 대문간 옆에 아름드리 복사꽃이 피고, 벌들이 집을 떼밀고 갈듯이 윙윙거리는 봄날이 오면, 그날이 오기만 하면 마냥 봄볕바라기를 하며 어린 속살을 불려가던 날들이 있었음을 추억한다.

그런 지울 수 없는 날들이 봄날을 타고 오기만 하면 내 발길을 자연스럽게 종묘상으로 이끌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봄날의 추억과 생활의 꽃들은 결국 나를 필연적으로 시의 밭으로 이끌었으리라. 그렇지 않던가! 봄날이 겨울에서 완성을 이루듯이, 생성의 강물이 소멸의 강물을 공유하듯이, 꽃으로 물든 내 몸의 속살은 시로 피어나는 정신의 속살을 이루는데 어떻게든지 아는 체했을 것이다. 힘을 보탰을 것이다. 봄날을 피는 꽃처럼, 시를 사는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향기로운 귀띔을 했을 것이다.

겨울을 외면하는 꽃나무치고 제대로 된 나무가 없다면, 죽음을 모르쇠 하는 시인치고 제대로 된 시인일 수 없다고 늘 나를 채근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시는 서풍을 타고 와서 넌지시 죽음을 예고하는 메시지와 다름없다. 누구나, 생명 있는 것 치고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꽃나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꽃은 필 때를 알고 때를 맞춰 꽃을 피우지만, 또한 꽃은 질 때를 알고 서슴없이 저를 지운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나를 들여다보면 그런 것 같다. 필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질 때가 언제인지도 모른다. 모를 뿐만 아니라, 영원의 저쪽을 넘겨다보려 쓸데없이 자신을 낭비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다. “시는 서풍에 담겨오는/ 야윈 바람이다.”

그렇다면 봄을 희망으로 발음하고, 재생으로 색칠하기를 좋아하는 것 또한 난센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봄은 어쩌면 잠깐 동안의 환상에 불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살아야 한다는, 잘 살아야 한다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말없는 노래’[無言歌]일 수도 있겠다. 남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어쩔 수 없이(?) 일제히 꽃을 피우는 모든 봄꽃들처럼, 사람들도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꽃을 심고 가꿔보면 안다. 시든 꽃나무에 물을 주고, 떨어진 꽃잎을 거두다보면 보인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그 향기가 오래가지 않으며, 화려한 자태일수록 그 지는 모습이 초라한 것은 물론 추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그래서 꽃을 가꾸듯 시를 가꾸다 보니 알고 보였던 것일까? “버려도 아깝지 않은, 나를/ 꽃말을 담아 꽃나무에 걸어둘줄을……!

그래서 알았다, 보았다. 시는 시인들이 시적자아라는 나무에 걸어두는 꽃말이라는 것을. 풀꽃마다, 꽃나무마다 꽃말이 있듯이, 하물며 인간이랴! 사람됨의 가장 정채[精彩-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한 경지 역시 꽃과 다름없다. 갓난아기의 싱그러운 미소만이 꽃이 아니다. 피 끓는 청춘만이 꽃이 아니다. “버려도 아깝지 않은, 나를발견한 사람도 꽃이다.

가장 꽃다운 날을 빛에 담아 앨범에 간직한다. 세월의 간자間者는 어떻게 알고 그 내밀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꽃다운 날들의 빛을 바래게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추억의 앨범을 만든다. 그래도 오랫동안 삶의 빛이 바래지 않는 앨범은 봄날의 속살에 봄꽃을 심는 일뿐임을 알겠다. 그래서 그렇다. 시심은 봄날의 속살에 꽃을 심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