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문不二門에 이르기 위한 사람공부”
“불이문不二門에 이르기 위한 사람공부”
  • 전주일보
  • 승인 2024.03.1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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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54

 

초등학교 신입생아이 등교 준비하느라

온 집안 날마다 북새통꽃을 피워요

 

누나는 신주머니에 하얀발걸음 담아주느라

형은 주머니에 알사탕돌주먹을 넣어두느라

아빠는 당나귀 고삐를 당겨 안장을 얹어두느라

정보원 엄마는 호롱등잔 눈길로 미행하느라

소리 없는 웃음꽃들이 시끌벅적 피어나요

 

새삼 어느 학교, 무슨 학과에 입학하려는지

할머니는 요가로 노령을 단련하시고

페달을 밟아 달려가시는 할아버지도

늦지 않게 불이문不二門에 닿을 듯해요

 

정작 어린 전사는

뭐 아무 일 없다는 듯

보도블록 사이에 핀 새봄에게도 암호를 건네고

지나가는 푸들에게도 비밀번호를 묻느라

아침 해가 서둘건 말건

학교종이 울리건 말건

그냥, 학교에 가요

 

졸시등교준비전문

교과서를 익히는 것만 공부라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렇다고 단정할 만한 무슨 설문조사나 연구 결과를 참고한 것도 아니라, 이는 순전히 필자의 억지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학교 공부를 지겹게 해온 이력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할 법하다. 부모님께서 공부하라!”는 당부나 명령은 반드시 책을 보고 공책에 뭔가를 쓰는 것만을 지칭하지 않았던가? 열공의 발심을 내어 모처럼 구한 동화책을 읽는다든지, 뭔가 조몰락거리며 발명품을 만든답시고 몰입한다든지, 동네공터에서 또래들과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면, 으레 부모님의 지청구가 따라왔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무슨 헛짓거리를 하느냐!”고 불호령을 내리시곤 하지 않았던가?

 

이런 내력들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숙제를 하거나, 시험 준비하는 것을 공부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사실 숙제나 시험 준비도 공부는 공부겠지만 공부는 보다 폭넓은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다.

우선 <논어>에서 밝힌 공부의 뜻은 공부의 원 개념쯤 될 법하다. 제자가 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제자가 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다.[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논어. 안연편>] 그러니까 공자의 공부는 사람공부만이 학문과 수양의 목적임을 밝힌다. <논어> 전편에 담긴 가장 중요한 덕목을 하나만 들라고 하면 바로 이것, ‘사람공부일 것이다. 그러니까 숙제하고 시험 준비만이 공부의 전부는 아니었다.

 

불가에서 공부는 매우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선가의 수행법에서 볼 수 있다. ‘하안거-동안거라고 해서, 여름철 백일, 겨울철 백일 동안 화두를 참득하기 위해 침묵 수행하는 과정이 공부다. 오로지 사유의 핵심으로 내건 화두를 깨뜨리기 위해 참선의 시간을 백일이나 집중한다는 것, 이보다 더 치열한 공부의 자세와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승들이 내건 화두의 내용은 무엇일까? 화두 역시 사람[自我]’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선불교에서는 선사들의 정진을 돕기 위해 이런 의문들을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의 형태로 만들어 화두, 혹은 공안公案이라고 했다. ‘공부의 안독에서 나온 공안[화두]를 붙들고 참선하는 선사들의 수행이 곧 사람공부였다. 그러니 공부란 곧 사람을 아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린아이들이 학령에 이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온 집안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꼭 이맘때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사람공부를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여린 아이가 꽃샘추위를 뚫고 등교할 수 있도록 온 가족이 나선다. 두어 살 터울의 언니는 신주머니를 챙겨주기도 하고, 그보다 더 배운 형은 동생의 안부를 달콤한 말로 귀띔한다. 아빠는 짐짓 외면한 채 출근준비에 바쁠지라도 온 신경은 아이에게 쏠려 있을 것이다. 가장 애를 태우는 건 엄마다. 저 여린 것이 홀로 학교를 찾아갈 수 있을까? 매번 아이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건 하책! 그래서 멀찌감치 뒤처져 바람만바람만 따라가 본다.

 

성장하기 위해 등교준비를 하는 건 어린아이만도 아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노령老齡에 이르러 등교준비에 용맹 정진한다. 노화老化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횡포[또는 선물(?)]이지만, 노쇠老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건전한 등교준비임을 잘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맨손체조나 걷기를 꾸준히 하더니, 요즈음에는 요가에 푹 빠져 지낸다. 할아버지 역시 걷기나 근력운동에 열중하더니 요즈음에는 실내자전거 타기에 재미를 붙였다.

 

학교에 가면 공부를 한다. 그 공부라는 게 곧 사람공부다. 사람공부의 목적은 성장에 있다. 어린아이야 날마다 공부하여 성장한다지만, 노령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성장하는 공부를 위해 등교준비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성장이란 곧 변화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란 곧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 어린아이는 꽃샘추위를 뚫고 학교에 가고,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 역시 등교준비를 한다. 요가를 하고 실내자전거를 타는 게 사는 날까지 사람답게살기 위한 등교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다면 어린아이나 노인의 등교준비가 다르지 않다. 젊음과 늙음이 한 가지다. []과 죽음[]도 한 길이다. 그런 공부 끝에 우리는 모두 불이문不二門 에 이르게 된다. 사람공부를 잘하면, 삶과 죽음을 초월한 해탈解脫에 이른다. 그래서 불이문은 곧 해탈문이다.

 

이 교문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한 평생을 바쳐 공부하는 셈이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이미 해탈한 존재다. 시간이 가건 말건[아침 해가 서둘건 말건], 사람세상이 뭐라 하건 말건[학교종이 울리건 말건] 보도블록 사이에 핀 민들레꽃이 궁금하고,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인사한다. 사람공부가 잘되어 성자가 된 유학자나 해탈한 선사의 모습을 어린아이에게서 찾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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