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어떤 인연
  • 전주일보
  • 승인 2024.02.0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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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김고운/수필가
김고운/수필가

그때 그 조금은 암팡지던 여자아이,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 여동생이 친구라고 소개하여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그 아이를 처음 보았다. 머리를 갈래로 땋아 묶고 전주사범학교 배지를 달고 교복을 입었던 아이를 본 순간, 난생처음으로 사람의 가슴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뛸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큰북 소리보다 크게 내 가슴을 폭파해버린 그 는 엄청난 미모도 아니었고, 날씬한 체격도 아니었다. 그저 통통하고 조금 예쁘장한 가운데 눈빛이 맑고 깊었다. 나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 맑고 깊은 눈에 풍덩 빠져버렸다.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는 유홍준 시인의 <주석 없이>라는 고백처럼, 그 아이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감전되듯 내 전신을 관통하여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덩달아 얼굴만 붉어진 채 멍하니 서있는 날 보던 친구가 뭐라고 말을 이어주었으면 풀렸을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는데, 눈치 없는 녀석이 날 끌며 들어가자하는 바람에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아쉬운 눈길만 남기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눈빛이 왜 좋았느냐고, 어떻게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좋은 그 느낌에는 다른 이유가 끼어들 수 없었다. 조금 찡그린 듯 깊은 눈동자를 정말 잠깐 마주쳤는데, 10년을 바라본 듯 뇌리에 깊이 새겨져 지울 수도 파낼 수도 없었다. 그 눈동자는 내게 운명 같은 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단 한 번 나를 쳐다본 그 눈에서 이 세상을 다 보았다. 거기에는 푸른 바다와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초원이 있었다. 반짝이는 검은 진주와 에메랄드와 비취의 깊은 빛이 숨어있었다.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즐거움의 감정들이 들어있었고, 따뜻하고 뜨겁고 타오를 수 있는 사랑이 숨어있었다.

그런데도 내겐 만나서 말을 걸어볼 용기가 없었다. 처음 만나던 그 날, 벼락처럼 날 관통한 쇼크는 를 볼 때마다 거듭되어 말을 붙이기는커녕 오금이 저리기도 했고,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자꾸만 보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을 쳤고, ‘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섰다.

말도 못 붙이는 주제에 보고 싶은 마음은 어찌 그렇게도 크던지 매일 아침에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 학년 아래인 은 노송동 지금의 천주교 전주교구가 위치한, 당시 영생학원이 있던 산과 이목대 사이의 대밭이 있던 동네에 살았다.

은 남천교를 건너 학교에 가기에 내가 시간만 맞추어 나가면 틀림없이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아침마다 보았고 어쩌다가 가 날 알아보고 미소라도 살짝 보여주면 그날 나는 완전히 붕-떠서 날아다녔다.

그저 좋아하며 시간을 낭비하던 어느 날, 끝 시간 수업을 빼먹고 일찍 학교를 나왔다. 5.16쿠데타 군인들에 집안이 거덜 나는 바람에 학교고 뭐고 가슴에 분노만 가득하던 때였다. 전주 풍남동 골목을 지나오다가 샛골목에서 앳된 여자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렸다. 얼핏 이상한 예감이 들어 되짚어 샛골목을 들어가 보니, 아뿔싸! ‘를 앞에 두고 사범학교 남학생이 치근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에 쌍심지가 켜지는데, ‘가 날 알아보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때 녀석이 의 팔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언제 가방을 놓았는지도 모르게 내 던지고 녀석의 명치에 내 오른 주먹이 꽃혔다. 녀석은 !’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꼬꾸라져 엎어졌다. 녀석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져서 한참 동안 숨을 쉬지 못해 꺽꺽거렸다. 그 당시 아버지가 등사기로 책이나 서류를 만드는 프린트업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거의 매일 등사기로 등사하는 일을 거들고 있었기 때문에 오른팔을 뻗어 지르는 힘은 대단했다. 거기다 가뜩이나 분노에 일그러진 마음이 내재해 있던 판이었으니 그 펀치의 위력은 쇠 방망이로 명치를 치는 그런 맛이었을 게다.

녀석 옆에 있던 친구가 부축해 일으켜도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너 걔 다시 건드리면 죽어내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을 찾으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 보고 싶으면 그의 집 건너편 이목대 산 자락 조금 높은 곳에 앉아서, 그의 집을 내려다보며 편지를 쓰거나 되잖은 시를 지었다. 어쩌다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이면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도록 좋았다. 그때 를 생각하며 쓴 노트만도 여러 권이었다.

그 뒤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집안일을 돕던 외사촌 형도 서울로 가고, 모든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학교에 가는 둥 마는 둥 연로하신 아버지를 도와 돈을 벌어야 목구멍에 풀칠할 수 있었다. 그 아이를 생각하는 일조차 사치라 생각됐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앞에 나설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단념하는 쪽으로 마음이 정리되어 갔다. 그러다가 나는 공무원이 되어 전주를 떠났다.

한번 사로잡힌 마음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평생의 덪이었다. 결혼하고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에는 항상 빈자리가 남아있었다. 내 사랑은 온전할 수 없었다. 마음이 한가해지거나 울적할 때는 틀림없이 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는 동안 온전히 그 눈을 잊었던 적은 없었다. 마음 깊이 각인되어버린 그 눈은 잊을 만하면 어디서나 불쑥불쑥 보였다. 그 눈은 지금에 이르도록 지워지지 않고 아련하게 떠오른다.

언젠가 한 번 보고싶었지만, 다시 만난다면 내 오래된 기억 속의 눈빛과 새로운 눈빛이 달라 보일까 두려웠다.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꼭 만나서 한 번이라도 그 눈빛을 보고 싶기도 하다. 지금도 그 큰 북 치는 소리가 가슴에서 날 까닭이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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