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글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글
  • 김규원
  • 승인 2024.01.18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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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만/수필가
이용만/수필가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내 글을 좋아하고 내 글을 이해해 주는 사람. 내가 쓴 글을 건성으로 읽지 않고 정성껏 읽어주는 사람. 다음 글은 언제 쓸 거냐고 기다려 주는 사람.

내 글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자기가 겪은 것처럼 실감 나게 다시 말하여 주는 사람. 글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자기 친구처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내 글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가서 이곳이 글 속에 나오는 그곳이냐고 감격하는 사람.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소재를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돕고 싶다는 사람. 그래서 내가 어디에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따라나서는 사람. 전에 와보았는데 다시 오니 새로운 장소같이 느껴진다면서 내가 가보았던 여행지를 자기도 가보고 싶다며 같이 가보자고 졸랐던 사람.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하고 같이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알려준 사람.

그 사람이 필요할 때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나타나 주는 사람. 그것도 만사 제쳐놓고 바로 달려오는 사람. 필요하면 친구도 되어 주고 연인도 되어 주고 싶다는 사람,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자기 고향보다 더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 내가 살았던 동네에 가서 우리 집과 걸어 다녔던 골목과 뛰어놀았던 산과 들을 가보고 싶다는 사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도 가보고 내가 다녔던 직장 주변에도 가보고 싶고 내가 자주 다녔던 산책길을 함께 가보자는 사람.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아파하면 자기가 더 아파하고 자기는 아픈 것을 내색하지 않고 감추었던 사람. 내가 옮겨준 감기를 사랑의 감기라고 이름 붙여놓고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약을 먹지 않겠다는 사람. 내가 건네준 것이면 무엇이든지 보물처럼 간직하겠다고 말하더니 내가 사준 생수를 다 마시고 빈 병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가는 사람.

자기는 책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내가 지은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험공부하듯이 달달 외우고 있는 사람.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 사람. 자기가 좋아서 같이 있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를 가르쳐준 사람. 내가 화를 내어도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는 사람.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잘 자고 잘 일어났나요?”

이른 아침에 문안 문자를 보내주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주는 사람. 그러다가 만나자고 하면 번개같이 달려오는 사람. 초등학교 때 옆자리에 앉았던 짝꿍처럼 전날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잘도 말해주는 사람.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도 내가 환하게 알고 있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

인후공원 도당산 팔각정에서 자기 집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먼저 찾은 사람. 산책길을 나란히 걸으면서 두 마리 토끼가 산책하고 있다고 말했던 사람. 나하고 같이 있으면 토끼가 되어도 좋고 사슴이 되어도 좋다는 사람.

내 글 속에 자기를 등장시켜 주었다고 고마워하는 사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데 글 속에서 주인공 만들어 주어서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며 마치 신데렐라처럼 기분 좋아하던 사람. 그러면서 다음에 책을 내면 자기를 맨 먼저 주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 나의 독자 1번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 그를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나를 좋아해 주었던 사람.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 나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은데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던 사람. 나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

학창 시절에 만났더라면 참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고 어른이 되어 만났더라면 잉꼬부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 나는 그를 위하여 해준 것이 없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던 사람. 

영원히 내 곁에만 있을 것 같았던 그가 떠나던 날, 세상에는 그런 날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오래도록 어리둥절했고 그날의 일은 차마 글로 쓸 수가 없어서 내 가슴에 그냥 묻어두기로 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억새처럼 막무가내로 싹을 틔워 사방에서 하얗게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

나중에 잘해 주리라 미뤘던 대가를 혹독히 치르면서 빚쟁이가 되어 살게 해준 그 사람을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빈 세월만 흘러 이제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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