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숲
고향 숲
  • 김규원
  • 승인 2024.01.0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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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백금종/수필가
백금종/수필가

자그마한 숲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여기까지 오면 마음은 벌써 고향 집에 가 있고 어머니의 인자한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읍내에서 벗어나 10여 분 걸으면 노송이 장승처럼 서 있는 아담한 숲에 다다른다. 이 숲은 내가 어려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짧지 않은 세월, 우리 마을을 지켜오는 지킴이이다.

우리는 이 숲을 東林이라 부른다. 그 이름의 유래는 깊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해가 뜨거나 질 때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둠을 밀치고 동녘 해가 떠오르면 환한 빛이 제일 먼저 이 숲을 비춰준다. 그리고 긴 그림자를 그려놓는다. 한낮이 되면 갈 길 먼 길손도 쉬어가고 바쁜 농군들도 고된 일손을 접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서녘을 곱게 물들인 노을이 솔잎 위로 내리면 솔잎들은 마치 금빛 휘장을 두른 듯 찬란하다. 그 숲속으로 어둠이 내리고 산새들은 날아들어 고이 날개를 접는다.

이 숲에 들면 고향의 사연들이 솔방울처럼 흩어져 있다. 철부지들이 해가는 줄 모르고 내질렀던 함성이 아스라이 들려오고 배꽃같이 환한 순이의 미소도 새싹 되어 돋아있다. 그런가 하면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던 가슴 아픈 사연도 고목마다 새겨 있다.

초등학교 때였다. 이 숲을 지날 때면 가슴은 콩닥콩닥, 눈은 흘긋흘긋 숲을 바라보며 줄행랑을 치곤 했다. 오리목 뒤에서 총구로 겨누고 있는 빨갱이들이 있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웃집 아저씨도, 건넌 마을 형님도 이 숲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파다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먼 훗날까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가슴을 후비는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월의 강을 건너오고 있는 곳이 이 숲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숲을 손질하여 산뜻하게 가꾸고 규모도 줄였다. 지난날의 슬픈 흔적을 지우고픈 심정이었으리라.

칠십여 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렀다. 이제는 숲에 들면 호젓하리만큼 아늑하다. 푸른 나무들 사이를 걸으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하다. 여럿이 걸어도 좋고 혼자 걸으면 더욱 좋다. 가끔 산새들이 날아와 노래하고 냇물이 졸졸 흐를 때면 그들과 벗이 되기도 한다. 잡다한 감정의 보풀들이 가라앉고 마음이 편해지는 곳, 그곳이 바로 고향 숲이다.

고향 숲은 짙은 잎새에 햇볕을 오롯이 안고 마음껏 쏟아내는 솔향이 있어 좋고, 나의 호기심을 일으켰던 이름 모를 꽃들의 향이 있어 좋다. 그중에서도 젊은 가슴 뜨겁게 달군 것은 아카시아꽃과 밤꽃 향기이다. 교교히 달빛 부서지는 초여름 밤, 호수를 배경으로 늘어선 아카시아의 농염한 향기가 숲을 덮으면 나는 한동안 그 향기에, 그 분위기에 젖곤 한다. 눈을 감고 서 있으면 어느 낙원을 거니는 듯, 천상을 나는 듯, 한 마리 나비 되어 무한 허공으로 날아오르곤 한다. 고혹적인 그 향기, 내 고향의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칵테일 와인 맛 같은 향기이다. 지금도 그 계절이 되면 멀리서도 향기가 되살아나 금방 달려가고 싶기도 하다.

고향 숲은 사계에 따라 매력이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된바람 몰아치는 한천(寒天)을 머리에 이고 빈손으로 서서 고독을 삼키는 겨울이다. 잡다한 것 다 떨구고 오로지 독야청청 의젓한 모습은 인자(忍者)의 진면목(眞面目)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고향 숲은 나에게 어머니의 뜨거운 정을 느꼈던 곳이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워 준 곳이다. 그날도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원했던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가슴앓이하던 중이었다. 아버지는 창밖만 바라볼 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진학보다는 다른 길을 모색해 보라는 무언의 심사인 듯싶었다. 어머니는 어찌하든 공부는 계속해야 했다. 나는 부모님 생각의 갈림길에서 고뇌했다. 무거운 마음을 달래러 그 숲에 들었다. 나뭇가지 위로 쏟아지는 눈을 보며 불확실한 미래에 번민했다. 도화지처럼 맑고 하얀 눈 위에 나의 자화상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려보곤 했다.

너 여기서 뭘하고 있냐?” “걱정하지 마라.”

메아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가까이 서 계셨다. 어머니는 덥석 내 손을 꼭 쥐었다. 따듯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 뜨거운 숭늉처럼 마음을 녹여주었다.

한참 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잿빛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어머니는 마치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성모 같았다. 어머니의 머리 위로, 청솔 가지 위로 하얀 눈이 하염없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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