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가을 편지
  • 김규원
  • 승인 2023.12.21 1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 수필
김고운/수필가
김고운/수필가

추석날 해설피에 동네 공원에 갔다. 늘 왁자하게 떠들며 노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이다. 명절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평소 쉬는 날에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 나와서 어린이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정경을 보는 게 좋았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도록 뛰고 달리며 깔깔거리는 천사 같은 아이들은 내 냉골 같은 가슴에 들어와 놀다가 불을 지펴주고 덜 아문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덩그러니 매달려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그네, 나무에 달린 사과처럼 아이들이 주렁주렁하던 정글짐, 금세 개구진 아이들이 쏟아져 내려올 듯한 미끄럼틀을 바라보다가 아득한 그리움의 무게에 눌려 주춤주춤 그네에 걸터앉았다. 아이들이 노는 걸 볼 때 나도 애들처럼 흔들려보고 싶었었다. 그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자 타임머신에 앉은 듯 생각이 날아가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멀리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그러더니 이내 점점 가까워져 숨찬 소리, 비명처럼 내지르는 새된 소리가 지척에 이른다. 소리와 함께 추석날 새로 신은 운동화가 더러워진다며 한쪽에 얌전하게 벗어놓고 맨발로 뛰는 작은 형도 보인다.

헌 양말에 솜뭉치나 현 헝겊을 욱여넣어 동그랗게 꿰맨 공을 빨랫방망이로 치고 달리는 '방울치기' 놀이에 땀을 흘리는 셋째 형도 있다. 어서 들어와 밥 먹으라고 채근하는 큰누나도 보인다.

그 아득하지 싶은 소리와 얼굴들이 환영처럼 지나갔다. 덧니가 예쁜 아내의 젊은 시절 얼굴, 아픈 몸으로 태어나 내 품에서 꼬물거리며 옹알이하던 첫딸,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 푸념 속에 술과 담배에 절어 살다 먼저 간 친구까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내 가슴에선 언제나 건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있는 그들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더욱 사무치는 얼굴들...

시간은 모든 것을 녹슬게 하고 부수어서 없애거나 새롭게 만들어낸다. 그 시간의 능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가슴에 간직되어있는 추억이 아닐까 추억이 아름다운 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숨어 끊임없이 각색되고 미화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내 아름답던 시절을 향한 그리움도 세월과 함께 각색되고 미화되어 꽃으로 피어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걸려있던 그림들과 소리가 그리움으로 번져 나오며 기어이 내 눈에서 한줄기 눈물을 끌어냈다.

젊은 시절에 극장에 가서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이 퉁퉁 붓게 울던 아내가 맹숭하게 눈도 깜박이지 않는 날 보며 모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내게서 언제부터인지 걸핏하면 눈물이 솟는다.

광화문 광장에서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든 아이와 젊은 어머니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작은 촛불을 보았을 때,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았을 때도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늙어 할 게 없는 나이가 돼서야 철이 좀 들었다. 돌덩이 같던 마음이 물러져서 쉽게 감동하고 눈물이 터지면 걷잡기 어렵다.

내가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그네에 앉아 있을 때, 어떤 기척에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웰시코기' 강아지가 예쁜 눈으로 날 바라보며 앞발을 쳐들어 내게 다가서려 하고 있고 목줄을 잡은 주인이 강아지를 당기고 있다. 같은 아파트 라인에서 가끔 만나면 알은체를 하던 예쁜 녀석이다. 날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어쩌면 강아지에게 내 그리움과 외로움이 감지되어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일어섰다. 안면이 있는 강아지 주인에게 겸연쩍은 눈인사를 건네고 그 자리를 벗어나 공원길로 들어섰다. 명절인데 그네에 동그마니 앉아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이 어지간히 궁상맞아 보였을 것이다.

공원 길에는 벌써 가을이 질펀하게 깔렸다. 아직 초가을이건만 일찍 나무에서 내려온 잎들이 노랗고 붉게 변해 가득히 널려있다. 나무에 달린 잎은 아직 제대로 물들지 않았어도 생기를 잃어 누르스름하거나 색이 들기 시작했다.

세월은 무엇이든 그대로 두지 않는다.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이란 만물이 변하는 정도를 인간의 생각에 맞추어 설정한 작은 단위이다. 나이 들어 시간이 만드는 변화에 뒤지지 않고 적응하느라 무진 애를 썼건만, 안간힘이 무색하게 지치고 허물어져 아득하다.

떨어진 잎이 피었던 자리에는 봄이면 다시 새 생명이 피어 초록으로 빛날 것이다. 한 장의 낙엽이 지는 일이나 한 사람이 세상을 뜨는 일의 의미는 별반 다르지 않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우주의 눈으로 본다면 잎새 한 장과 한 사람의 가치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가을이 점점 깊어지면 누르스름한 잎새들도 울긋불긋 물들어 마지막 정염을 불태우고 떨어져 구를 것이다. 어쩌면 내 삶의 시간에서도 나는 이미 붉게 물들어 시든 잎이어서 떨켜가 작동을 시작했을 것 같다.

내 삶은 떨켜가 잎새를 떨구기 위해 안으로 갈무리하는 찰나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셈이다. 이 짧고 다급하지만, 소중한 시간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해마다 이때가 되면 혼자인 것을 절감하고 떨어지는 낙엽이 내 모습인 듯 두려웠다. 해가 지날수록 새봄을 다시 맞을 수 있을지 모르는 가을이 무섭다. 가을은 그냥 훌쩍 건너뛰었으면 안 될까? 지는 낙엽을 보며 나도 오래지않아 저렇게 떨어져 구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가을은 혼자 견디기는 너무 버겁다. 내게 남은 시간 동안이나마 공원에서 만난 웰시코기처럼 내 외로움을 거니채고 보듬어줄 누가 옆에 있다면 이 가을이 조금 견딜만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 또한 내게 지워진 운명이려니 한다.

그렇다 해도 이번 가을엔 부서지고 벌레 먹은 갈잎의 편지가 아닌, 풋풋한 상록의 편지를 부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