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순간보다 영원한 것은 없다”
  • 김규원
  • 승인 2023.12.18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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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44

 

간밤의 어둠을 지울 만큼

눈이 내렸다

 

공원광장 차가운 화선지에 쓰인

뜨거운 맹세

낙관을 찍느라 발자국이 어지럽다

 

정 수 아 름 포에버

 

저들에게 어떤 아침이

부러움을 비춰 지우고 싶겠는가

 

그럼으로

모든 언약은 눈 위에 쓰는

피 끓는 설형문자다

 

-졸시설문전문

 

시를 쓰면서, 시를 공부하면서 가슴에 새겨둔 말이 있다. “시의 애매함ambiguity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시가 어렵다는 것도, 그래서 독자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하여 점점 더 시문학이 찬밥신세가 된다는 것도, 모두 이 난해함에서 오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어렵다는 평판에 동조하여 쉽게만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시의 숙명이다.

물론 시다운 시는 애매하면서도 쉽게 독자의 구미를 당기겠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아 세상 시인들의 고민이 깊다. 쉬우면서도 재미있고, 깊이가 있으며, 나아가 아름답기까지 하여 감동을 주는 시를 어느 시인이 쓰고 싶지 않겠으며, 어느 독자가 만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시의 난해함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바로 함축성의 문제다. 시가 과학은 아니지만 과학보다 사실적이며, 시가 수학은 아니지만 수학보다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 시인들이 추구하는 시심이다. 나아가, 시는 말밭[辭典]에서 시어를 고르지만 말밭의 경계를 무시로 뭉개버리고 뛰어넘으려는 반역[반어-역설]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짧은 표현 속에 보다 많고 깊이 있는 것[정서+사상]을 담고자 한다. 그러자니 애매하고 모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우리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윤동주의「서시」의 결구는 이렇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표현은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고, 문법적으로도 흠결을 집어낼 수 있다.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 별이 있는 우주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어떻게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스치운다’는 피동형 보조어간 ‘우’를 첨가할 필요도 없이 그냥 ‘스친다’고 피동의 뜻을 드러낸다. 굳이 ‘우’를 더 첨가하는 것은 이중피동형으로 불필요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며 엄혹했던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버텨냈던 시인 윤동주의 서정과 사상을 잘도 읽어내고 이해하며 감동을 받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별은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별만은 아니다. 보다 깊은 함축성을 띤 말이다. 시적 자아가 실현해 내고 싶지만 쉽게 달성되지 않는 이상적 목표가 ‘별’로 상징되어 있다.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아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할 소명, 젊음의 정기를 마음껏 발휘하고 싶은 순수한 열정 등은 소중한 이상이지만 쉽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런 소중한 꿈이 일제의 온갖 만행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음을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을 뿐이다. 그것도 한 번만 피동형으로 하면 시적 화자의 성에 차지 않으니, 이중피동형으로 표현하는 그 간절함과 절박함을 드러내려 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해하기 쉬운 표현보다 어렵지만 함축성의 폭과 깊이가 있는 표현을 통해서 시의 참맛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시를 읽는 재미다. 그래서 시의 난해성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했을 것이다.

제목 ‘설문’에 한자를 붙일까 말까 망설였다. 난해하다는 항의(?), 이해하기 어렵다는 저간의 불평을 익히 아는 터라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말로 토를 달지 않았다.

역시 함축성의 폭과 깊이를 고려해서다. 만약 한자로 토를 단다면 ‘雪文설문’이었다. “눈으로 쓴, 눈밭에 쓰인 문자”정도의 뜻이다. 그렇게 토를 달았다면 시에 함께 담고 싶었던 ‘設問설문-질문을 만듦’이나, ‘楔形文字설형문자-쐐기문자처럼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 그리고 ‘說文설문-어떤 상황을 설명한 말’ 등의 함축성은 위축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아예 독자들에게 한 가지 뜻으로만 독해하도록, 오독하도록 유도하는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자로 토를 달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은 잠시 헤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헤매지는 않고 자신의 말밭에서 잠자고 있는 온갖 체험에서 건진 말들을 동원하여 맞춰 보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그 시도하는 과정이 곧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이 ‘쉽게 쓰인 시’에서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시는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을 일부러 찾아 드러냄으로써 불필요한 것과 쓸모없음이 어떻게 시의 길에 참여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그리하여 아침에 공원에 나가보니 “어둠을 지울 만큼/ 눈이 내렸다” 폭설은 아니고, 그렇대서 서릿발처럼 얇게 쌓인 눈도 아닌 눈밭이다. 저들 청춘남녀는 밤을 꼬박 새우며 그 눈밭을 화선지나 도화지 삼아, 아니면 무슨 약혼서약서에 도장을 찍듯이 설형문자로 자신들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 것이다.

그 정열이 부럽다. 겨울 추위쯤 아랑곳하지 않고 눈이 내리는 공원에서 쐐기문자처럼 어지럽게 새겨둔 맹세처럼 영원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 해가 뜨고 나서도 그 맹세가 영원할 수 있을까?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청춘남녀의 사랑을 시샘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사랑이 어여뻐서 그 맹세의 문장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말 것이다.

낙관까지 찍어둔 맹세가 녹아 없을지라도 맹세의 순간만큼은 영원하다. 청춘남녀의 약속만이 아니다. 모든 맹세나 언약은 결국 순간이 쌓여서 이루어진 설형문자일 뿐이다. 영원은 순간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순간보다 더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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