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시를 읽는 동심”
“꽃과 시를 읽는 동심”
  • 김규원
  • 승인 2023.12.11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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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43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이는

벌 나비뿐

 

이 안에

무엇이 없는지

아는 이는

어린아이뿐

 

-졸시꽃과 시 1전문

 

“이건 아주 작지만 들어 있을 건 다 들어 있는 게 무엇일까?” 유치원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씨앗이요~!”라고 대답했다. 요즈음 어린아이들에게는 사물의 감각을 익히기 위한 다양한 매체가 있다. 그림동화책은 기본이요, DVD영상이나 갖가지 놀이기구나 모형들이 즐비하다. 여기에다 철에 따른 계절감각을 익히기 위해 다양한 체험활동을 하면서 논다. 유치원아이들에게 체험은 곧 놀이요, 놀이는 또 다른 학습이다. 이런 놀이 활동이 아이들 인식의 범주를 놀랍게 높이고 있다.

유치원 어린아이들이 씨앗의 작용을 알아서 그렇게 대답했을 리는 없다. 그래도 그들의 대답에서 어른들이 한참이나 헤매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씨앗’을 쉽게 찾아내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림책에서 본대로, 혹은 체험활동 시간에 선생님의 손을 잡고 채마밭에 채소 씨앗을 심으며 느꼈을 감각적 체험이 아이들의 대답을 유도했을 것이다.

어른들이라고 그런 정보를 익히지 않았을 리 없다.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씨앗’에 관한 정보를 체득하고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왜 쉽게 대답을 찾을 수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들에게는 단순하면서 순진한 직관이 살아있기 때문이요, 어른들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순수 직관 능력이 퇴화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퇴화라기보다는 더 많은 인식의 정보들이 직관의 능력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묘하게 인식의 정도를 드러내는 게 앎이다. 꽃을 아무리 ‘분해-분석-분리’해 봐도 꽃일 뿐이다. 그러나 벌과 나비는 꽃의 됨됨이를 직관적 본능[감각]으로 알아챈다. 이렇게 보자면 동물의 인식 차원도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꿀을 찾기 위해 꽃의 향기를 쫓아가는 일 말고 다른 데 관심[탐욕]을 부리지 않아야 겨우 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도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한 직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나라의 도덕성을 알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이 말을 패러디 하자면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나라 어른들의 성숙성을 알 수 있다.”

시詩도 그렇다. 꽃의 됨됨이를 어른들처럼 시시콜콜 아는 게 씨앗의 정체를 아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시도 그렇다. 시의 됨됨이를 시시콜콜하게 아는 게 오히려 시의 속성을 아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시가 보여주는 말의 회화[心象-image]을 그림으로 볼 수 있는 눈, 시가 들려주는 노래[운율-rhythm]을 음악으로 들을 수 있는 ‘순수 직관력’이 있어야 시를 시답게 만날 수 있다.

‘이 안’은 무엇의 ‘안’일까? 삼라만상 그 어느 것이라도 대입하면 된다. 꼭 꽃일 필요는 없다. 사람을 대입해도 다르지 않다. 사람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길은 벌과 나비다운, ‘순수한 [언어]감각’이 없이는 알 수 없다. 시에 쓰이는 언어는 세속의 사람들이 덧칠한 누더기 말이 아니라, 말이 지닌 원시적 순수태純粹態의 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각이라 했지만, 사람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사람됨의 모든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다만 ‘사람다움’이 아닌 감각으로 사람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기란 불가능하다. 흔히 사람을 겉모습으로 다 알았다는 듯이 말하곤 한다. 겉모습은 실체를 가린 옷차림이거나, 훈장이나 벼슬, 타인들의 평판이기 쉽다. 그러나 사람의 안에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로는 알 수 없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사랑’은 사람의 안에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랑의 실체라기보다는 그 나뭇잎 한 장일 뿐이다. 사람 안에 간직한 사랑의 농도를 감별하려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파동을 감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사랑의 꿀맛을 알아내려면, 벌과 나비가 ‘꿀’을 감별하듯이, 어린아이가 ‘씨앗’을 직관하듯이, 순수한 감각이 작동하지 않고서는 알아낼 길이 없다.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내적가치들-관용성, 포용성, 배려하는 마음, 동정심, 정의감, 희생, 겸손 등등, 사람됨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은 벌 나비가 꿀을 간직하고 있는 꽃을 찾아내듯이 찾아나서야 한다. 그래야 꽃다운 사람의 꿀과 향기를 음미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란 형태 속에 간직한 사람됨의 꿀을 느낄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한다. 반려견犬이나 반려묘猫들이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드러내듯이, 어린아이들도 순수한 직관으로 시가 간직하고 있을 ‘씨앗’을 느끼며, 느낀 대로 호불호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안에 무엇이 ‘없는지’는 그것만으로도 불가능하다. 비본질적 요소들로 가득 채우고 있는 ‘안’을 들여다보려면 좀 특별한 감식안이 필요하다. 필요하다기보다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감식안이라는 게 결국은 경험의 총화일 뿐이다. 기존의 경험칙, 기왕의 사례, 기성의 전범[典範: 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만으로는 무엇이 없는지 알아낼 길이 없다. 경험이나 사례에서 벗어나 순수-순결한 상태가 아니고서는 이 안에 무엇이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이를 ‘어린아이[三尺童子]’라 하고, 어린이들이 발휘하는 감식안을 ‘어린이다움[童心]’이라고 한다.

꽃과 시는 같다. 무목적적합목적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꽃은 꽃다움 말고 다른 목적이 없다. 시도 그렇다, 시는 시다움 말고 다른 노림수가 없다. 그래서 벌과 나비 같이 기존의 앎으로 오염되지 않은 감각을 지닌 어린 마음결만이 있음과 없음을 감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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