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날
  • 김규원
  • 승인 2023.11.30 14: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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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수필가
김영숙/수필가

흔히 못생긴 여자를 호박꽃도 꽃이냐?’ 한다. 호박 자체는 친숙하고 수더분한데, 일상 쓰임에서 못난 것의 대명사로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호박꽃, 물론 꽃이다. 그것도 아주 유용한 꽃이다.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포근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정자 같은 통꽃이다. 그런 꽃을 비아냥거림의 대상으로 사용하니 꽃은 참 억울하겠다. 이른 아침 곱게 단장하고 그윽한 꽃 향을 품으며 우아한 치맛자락을 슬며시 들어내 보이는 꽃을 보고도 그리 비하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여느 꽃보다 훨씬 유용한 꽃이라는 걸 이미 오래전에 다 인정하지 않았는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먹을 게 귀하던 조상들에게 열매, , 대까지 모두 먹을 수 있는 호박을 얻는 건 큰 행운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생겨난 속담이다. 호박을 놓치다.’라는 속담 또한. 뜻밖에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생긴 좋은 일이나 좋은 물건을 차지하지 못하고 놓친 걸 아쉬워하는 말 아니든가? 물론 호박이 꽃에 비해 후한 대접을 받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꽃 없이 어찌 호박이 있을 수 있으랴? 그러니 호박꽃은 절대 천하거나 그리 만만하고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 이익과 재물을 뜻하는 귀하신 몸이라는 걸 짐작한다. 세상살이에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듯 조금 떨어지고 서툰 삶도 호박같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호박이다. 그렇지만, 놀림과 존중을 함께 받으니, 호박은 좀 헷갈리기도 하겠다.


위에서 말했듯 호박은 잎에서부터 씨에 이르기까지 버릴 게 거의 없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연한 잎은 쌈으로, 잎과 줄기는 호박대 국으로, 그리고 애호박은 담백한 호박 무침으로, 늙은 호박은 호박죽을 맛깔스럽게 끓여 먹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엿을 만들기도 하고 씨는 말려서 기름도 짜고 노릇노릇하게 볶아 강정도 만들기도 하니 호박에 관하여 후한 속담들은 호박이 가진 쓰임새와 영양소를 좋게 평가해서 생긴 말 일게다. 나 역시 출산한 후 시어머니께서는 손수 솥단지에다 고아 호박즙을 내서 주셨는데, 출산 후 부기를 빼는 데 보약보다 더 낫다는 걸 경험했다


호박은 장소를 마다하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자라는 서민 같은 수더분함을 지녔다. 이웃 어르신은 아파트 단지 귀퉁이 척박한 땅을 일궈서 호박을 심었는데 어느 날은 호박 잎을 따주셔서 살짝 데쳐 쌈을 싸 먹으니 칼칼해서 입맛을 돋우는데 최고라며 남편이 좋아했다. 서리가 내리기 직전에는 넝쿨째 걷어다 주셔서 구수한 된장국을 끓여 한 끼 식사 걱정을 덜어주시더니, 오늘은 호박죽을 끓여 먹으라며 손주 녀석 머리 크기만 한 늙은 호박 한 덩이를 안겨 주신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 있는 날이 한정되어 이웃분들과의 교류도 뜸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는데, 어르신은 호박만큼이나 넉넉한 인정을 베푸신다. 어찌나 고맙고 미안하든지 호박죽이라도 맛있게 끓여서 나눠드려야겠다 싶어 오래전 끓여 본 기억을 되살린다. 호박죽을 쑤려면 우선 호박의 껍질을 벗겨야 한다. 호박껍질은 단단해서 과일 깎듯이 쉽게 생각했다가는 손을 베기가 일쑤다. 일단은 조심스럽게 호박을 반쪽 내고 속살과 씨를 꺼내고 껍질을 벗기기 편할 크기로 골을 따라 자르면 초승달 모양이 되는데 이때 껍질을 벗긴 후 토막토막 깍둑썰기를 한다. 이렇게 자른 호박을 압력솥에 넣고 물과 호박을 일대일 비율로 부은 뒤, 붉은 팥을 한주먹 씻어 넣고 이십 분 정도 끓인다. 팥을 따로 끓여서 죽을 다 끓인 후에 팥을 섞기도 하지만, 나는 아예 처음부터 함께 삶는다. 팥물이 우러나 색은 별로 안 예쁘지만, 호박과 팥물이 어우러져 맛은 그게 더 좋다. 이웃과도 이리 어우렁더우렁 살아야 살맛 나는 세상일진대 아직 나는 설익은 인생이 아닌가?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과정이다.

 

호박이 푹 익으면 잘 으깬 다음 약한 불로 한 시간 정도 저어가며 더 끓이다가 불린 찹쌀을 믹서기로 갈아서 써도 되고 찹쌀가루가 있다면 가루를 끓는 호박죽 위에 살짝 뿌려 주고 뚜껑을 덮어 한소끔 끓인다. 그러면 찹쌀가루는 밥 알만하게 덩어리가 져서 팥죽의 새알심 역할을 한다. 그렇게 보글보글 한소끔 끓으면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 후 식탁에 올린다. 호박죽은 뜨거울 때보다는 어느 정도 식었을 때가 맛을 더하는 것 같다. 큰 솥단지에 군불 때 오랜 시간 끓이시던 어머니처럼 깊은 맛을 낼 수는 없지만, 식구들은 나의 호박죽 끓이는 솜씨는 제일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칭찬이 푸지다. 호박껍질을 벗기고 썰고, 삶고, 으깨고, 그리고 끓이면서 소금과 설탕만으로 간을 한 것뿐만 아니라 식구들을 향한 사랑을 듬뿍 양념했기 때문이라며 나도 너스레를 떤다.

 

이래저래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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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2023-12-02 08:01:35
호박댓국 생각나는 아침입니다.잘 읽고갑니다

동이 2023-11-30 17:37:04
호박죽처럼 맛깔스러운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