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멍
그리움 멍
  • 김규원
  • 승인 2023.09.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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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수필가
김고운/수필가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아 꺼질 듯 조금씩 피어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모닥불이 힘을 잃어 꺼지려 할 때쯤에야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불 멍’이라고 한다던가? 불 멍이 지나는 시간은 빈 시간이다. 생각이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에 끌려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비어버린 시간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 공空, 허虛, 이름조차 지을 수 없는 무아지경의 시간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불을 보다가 멍~하는 순간에 빠져 버리듯, 내가 겪는 또 다른 빈 시간이 있다. 갑자기 그리움에 빠져들어 지난 시간에 빠져 헤매다 보면 어느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간절한 그리움 속에 내 의식이 쓰러져 있음을 발견한다. 살아온 시간이 많아져 그리운 것도 많다. 문득문득 그리움에 빠져들어 있다가 불 멍하듯 멍해져 있는 나를 본다. 그래서 멍해 있는 시간을 ‘그리움 멍’이라고 이름 지어 보았다. 그리움 멍은 기억의 저편을 떠돌던 마음이 머문 자리에서 아련함에 빠져 멍~해진 순간이다.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아득한 지난 시간의 기억이다. 얼핏 찰나인 듯 지나버린 시간 속에 아직도 남아서 날 ‘그리움 멍’으로 이끌어가는 아픔과 슬픔, 지극했던 사랑과 애틋한 생각들이 가끔 날 그리움 멍으로 인도한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기억하느라 틈이 남아있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용케도 생생하게 남아서 날 아프게 하고 슬픔의 강에 밀어 넣는다. 세월이 약이라던데 세월이라는 처방조차 전혀 약발이 듣지 않는 게 바로 그리움이다.

내가 사랑한 이들과 나를 사랑한 이들, 내가 보낸 시간과 나를 지나간 시간이 새삼 그리워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노년의 가을은 잎새가 오색으로 물들어 고와 보여도, 쓸쓸한 여운이 감도는 그런 계절이다. 내 가을은 유독 그리움이 짙어지는 계절이다. 나를 그리움 멍에 들게 하는 이들 모두 가을에 떠났다. 더위가 물러가고 세상이 온통 색색 옷으로 갈아입어 저절로 발걸음이 떼어지는 아름다운 계절이언만, 그리움에 치여 아픈 계절로 바뀌었다.

어려움 속에서 마침내 안정을 찾고 삶의 본디 의미를 알아갈 나이에 아내가 갑작스레 ‘소뇌위축’이라는 불치병을 얻었다. 대뇌만 정상이고 운동 중추를 움직이는 소뇌가 말라버려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던 아내는 눈을 깜박거리거나 눈동자를 움직이는 방법으로 내게 의사를 전달하며 병상을 지키게 했다. 내가 곁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차 병이 깊어져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까지 11년을 완전한 간병인으로 살았다. 요양병원에서 5년을 견디던 어느 가을날, 내가 문우들과 문학기행을 떠났던 10월 15일 오전 무렵에 아내는 가뭇없이 먼 길을 갔다.

해마다 가을이면 내가 곁을 지키지 않아서 고통 속에 먼 길을 떠난 아내의 아픈 음성이 들려왔다. 긴 시간 곁을 지키며 건넸던 애틋함과 사랑의 언어들은 그녀를 지키지 못한 죄업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비틀리고 일그러진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지난날의 고운 모습으로 보였던 아내다. 떠난 뒤에도 아내는 자주 내 꿈속에 함께 있었다. 건강하고 젊은 모습으로 같이 웃고 떠들며 살았다. 그런데 지난 5월 가정의 날에 아내의 유골함이 안치된 추모원에 가서 영정을 보고 마음을 나눈 뒤부터 단 한 차례도 꿈에 보이지 않는다. 잠들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서운하고 뭔가 허전하다.

보고 싶은 마음에 컴퓨터를 뒤져서 스캔해놓은 앨범을 열어 아내와 아이들이랑 즐거웠던 추억을 보기도 했다. 내 사진 모델이었던 아내의 고운 모습들이 앨범에 가득하다. 카메라 렌즈가 보이면 금세 생글생글 미소를 지을 줄 알던 그녀는 앨범 속에서 아직도 팔팔한 청춘이다. 모니터 가득하게 사진을 확대하여 보고 또 보며 지난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달렸다. 가슴 가득 그리움이 차올라 견디기 어려울 때까지 보았다. 제발 꿈에 한번 만나자는 생각으로…

그런 내 소망은 그리움만 더 키우고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은 생시에 생각하고 바라는 일들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도 헛것이었다. 앨범도 그녀의 유품도 약발이 듣지 않았다. 정말 영혼이 있어서 내 곁에 머물다가 아주 먼 명부冥府로 떠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전처럼 자주 꿈에 보이다가 내 끝날에 먼 나라로 안내해주기를 바랐는데 날 버리고 갔나 싶다.

이제 그녀가 떠난 지 8년, 그만 가슴을 비워 잊을 만한데, 아직도 나는 그 끈을 놓지 못한다. 아프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하고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아직도 남아 보속補贖하는 심사일까? 꿈에서마저 떠난 사람, 그리움으로만 남은 사람을 아직도 못 잊어 두리번거린다. 오늘도 산책길 벤치에서 ‘그리움 멍’에 빠져들었다가 어둑발이 내릴 즈음에야 깨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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