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네모를 그리며…”
“둥근 네모를 그리며…”
  • 김규원
  • 승인 2023.07.10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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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25

 

세상은 네모를 기특하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세상 안의 근심을

둥글게 색칠하느라, 긴 날들도

다정하게, 아주 밝게 창문을 열어 두었지

 

모두가 저들 네모마다, 곳간마다

자물쇠를 채우려 바쁠지라도

 

너는 언제나,

그리고 저문 날에도 가던 길을

뚜벅뚜벅 황소걸음으로 걸어가

밭도 갈고, 곡식도 거두면서

슬픔이나 근심의 모서리를 지워나갔지

 

우리가, 언젠가는 강물을 건너갈지라도

사방을 뚫어

먼 그리움을 둥글게 그리면서

함께 세상 각진 어둠을 지워나가도록

하자구나, 그렇게 하자구나!

 

-졸시고사告辭 -둥근 네모를 그리며전문

교직에서 4~50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 중의 몇은 지금까지도 따르며 찾으며 인연을 맺고 있다. 저들도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만나고 보면 그들과 교사와 학생이라든지, 어른과 아이였던 때의 기억보다는 서로의 인생길을 마주하는 소통의 대화가 가능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풋고추는 맵지 않으며, 익은 고추라야 맵다며, ‘선생이기를 고집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선생이었던 시절의 부족했던 빈구석을 찾아 정겨움으로 메워나가려 한다.

 

그러던 중 필자가 서생이요 시문학의 말석에서 무명을 벼리고 있는 줄을 잘 알고 있는 제자가 늙은 스승에게 젊은 가르침을 청한다. 내게 무슨 새삼스럽게 나눠 줄 지혜가 있겠느냐며 한사코 사양했으나, 무릎 가까이 다가앉으며 한 말씀을 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현직에 있을 때 좀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갖도록 격려하기보다는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성취의 길을 가도록 훈화했던 일들이 생각나 언제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한창 꿈 많고 호기심 많은 청소년에게 현실을 뛰어넘어 도전하고 모험하도록 앞길을 채근하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곤 한다.

 

이럴 때면 개방형 자율학교인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교장선생께서 만드셨다는 직업선택 10계명이 떠오르곤 한다. 1.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앞 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6.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라. 7.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요약하면, 가난하게 살아라, 나를 쓸모 있게 하라, 낮은 곳에 임하라, 땀 흘리는 삶을 살아라, 모두가 원하는 것을 피하라, 미개척 분야를 찾아라, 존경을 사서 받으려 말라, 겸손하게 처신하라, 가장 가까운 이의 말에 솔깃하지 말라,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을 선택한다면 바로 자신 때문에 고민하고, 우울해 하며, 슬퍼할 일은 없을 것이다. 즉 불행의 그림자를 붙들고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원해서 가난과 고통, 외로움과 슬픔을 스스로 떠안은 삶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가장 낮은 곳, 가장 좁은 길, 가장 가난한 삶을 선택했으니, 즉 처음부터 불행을 떠안고 출발했으니, 더 이상 불행할 일을 아예 싹부터 없앤 격이다. 그러니 남은 것은 행복뿐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나의 제자들은 어설펐던 선생의 가르침을 새겨들은 게 분명하다. 선생이 바담 풍이라고 가르쳤어도, 저들은 바람 풍이라며 제대로 새겨들었던 것 같다. 저렇게 자신의 분야에서 중년이 넘도록 건실하게 행복과 불행의 가늠자를 잘 간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중년을 넘어선 제자가 청하는 젊은 가르침 대신에 시 한 편을 만들어서 제시하였다. 그게 바로 고사告辭. 각 급 학교 졸업식에서 학교장이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훈화말씀을 회고사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 回顧辭라고 하면 단순히 수학과정을 되돌아보며 추억하는 말씀이 되기 쉽다. 실제로 회고사라며 예를 들어 보인 글들을 보면 옛일을 추억하는 내용을 잔뜩 실어놓고 있다.

 

그런데 스승의 말씀은 회고사보다는 告辭라야 한다. 고사는 가르침의 말씀이다. 에는 알리다는 뜻도 있지만, ‘가르치다, 깨우쳐주다는 뜻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 告辭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 되어야 마땅하다.

 

아무튼 이미 학교를 졸업한 지도 아득한 마당에 제자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시상이 둥근 네모. 모순형용이다. 둥근 네모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났다고 봤다. 그러나 모가 난 땅도 무한 확대하고 보면 둥근 지구가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세상은 규격화되고 반듯한 가치나, 질서 정연하고 날카롭게 각진 권위를 선호한다. 이에 미치지 못하면 불행하다 여긴다. 그렇지만 사람을 살리는 힘은 둥글다. 따뜻하고 다정하며, 친절하고 상냥한 것들은 언제나 둥글게 굴러가는 힘의 근원이다. 그 둥근 힘으로 슬픔과 어둠의 모서리를 지워가면서 함께 살아갔으면 싶다. 내가 뒤늦게 제자들에게 주는 고사告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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