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언어는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는다
맨발의 언어는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는다
  • 김규원
  • 승인 2023.06.26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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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23

 

모처럼 강천산이 불렀지, 강천사

독경소리로 발바닥에 지압을 받으며,

신발은 등에 졌으니, 애초부터

허리는 생활고의 기울기

노화를 달고 사는 백내장이 모처럼

오월 넘긴 전우들, 녹음천지가

시력검사하자고 달려들어도

조금도 겁나지 않았지

내 몸에 접지되어 방전된 시력이라면

이파리마다 새겨진

시어들, 모두 발음부호가 같다는 것,

그 정도쯤이야 색맹이 아니므로,

아니 문맹천지 세상에도,

푸름이 짙어 노망들성싶은 잎을 보고도

빨갛다, 발설하진 않을 것이므로,

맨발로 녹음을 밟아보면 보이지

강천사 독경소리를 달고 사느라

회문산 돌아온, 나무들조차

맨발인 채 서성거린다는 것을

 

-졸시맨발로 걸으며

-내 서정의 기울기 14전문

 

오월을 넘긴 유월의 숲은 장관이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노래했던 미당의 푸르른 날을 저절로 흥얼거리게 한다. 잘 다듬을 것도 없다, 자연 앞에서 서면 그저 모두가 빛이고 황홀경이다.

 

길가를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마침 내린 봄비를 가득 품고 노래를 부르며, 철따라 찾아온 산새들은 저마다의 음정으로 짝을 찾느라 분주하다. 지천이 초록이니 따로 눈길을 두남 둘 것도 없고, 보이는 이 모두가 초록 물결이니 따로 스케치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연이, 숲의 바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만이다.

 

때를 맞춰 순창 강천산을 찾았다. 시를 생활의 전면에 두신 서정의 신선들과 함께 걸었다. 서정 신선이라! 생활 전선에서 젊음을 온전히 불사르고, 얼마 남지 않은 노구의 여생을 이끌고 문예 교실을 열심히 찾아오시는 분들이다.

 

문학소녀, 소년은 구태의 언사다. 인생 2모작을 경작하는 생활인이면서, 동시에 현실에서 잊어버린 동경의 세계를 꿈꾸는 분들이다. 비록 한쪽 발은 삶의 현장에 담가 두고 있지만, 다른 쪽 발은 언제나 좋은 시한 편 얻으려는 발심으로 뜨거우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열성과 열심을 곁에서 함께 하노라면 노 신선이란 말이 어울린다는 것을 실감한다. 세상과 조금은 비껴 앉은 자세로,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는 가운데, 흘러간 체험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불러오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을 노숙한 인생론으로 갈무리하는 솜씨가, 신선의 경지를 넘나드는 것으로 보이는 분들이다.

 

야외 학습이란 핑계를 달고는 나왔지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만 연발한다. 무엇이 그리도 노 신선들을 감탄하게 하는 것일까? 초록 천지 녹음 천국이 첫째다. 어디에 시선을 두건 모두가 평화요, 어디에 말을 걸건 모두가 사랑이라고 발음한다. 삽상한 바람이다. 푸른 숲을 흔들고 나온 바람들이 어쩌면 그리도 다디달단 말인가! ‘바람맛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치 처음으로 맛본다는 듯이 모두가 심호흡이요, 감탄사다.

 

맨발로 걷도록 조성한 숲길이다. 지자체에서 방문객들을 위해서 맨발 걷기 길을 조성하고, 매년 관리한다. 1.7km에 이르는 숲길이 맨발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요즈음 맨발 걷기가 대세다. 맨발로 걸으면 활성산소를 제어하여,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맨발 걷기 열풍이다.

 

계곡 물소리다. 며칠 전에 내린, 적지 않은 강수량을 보인 봄비를 머금고 있는 계곡물은 귀로 듣는 천상의 음악처럼 내내 동반자가 되었다. 가는 길마다, 굽어진 여울마다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속삭이는 계곡물 소리는 훌륭한 배경음악[BGM]이 되었다.

 

그리고 새소리다. 철따라 찾아온 새들이 짝짓기 철을 맞아 온갖 교태를 부리는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었다. 자연을 자연답게 하고, 숲을 숲답게 하느라, 빈틈없이 음향의 베를 짜고 있었다.

 

강천산은 강천사를 품고 있다. 회문산과 이어지는 자연의 산세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역사의 등줄기에 굵은 상처를 새긴 곳이다. 이곳에 야외 학습이란 명목으로 늦은 봄나들이-이른 여름맞이를 갔다.

 

역시 자연은 말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는 것처럼, 시심 역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한다는 법에서, 자연이나 시심이나 법문은 같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이런 자연의 법문을 들으려 이곳에서 맨발을 벗은 것이 아니겠는가.

 

설악무산雪嶽霧山 조오현 시승詩僧(1932~2018)은 언론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세속]일반의 길, 하나는 [탈속]종교의 길이다. 가는 길이 다르다.

 

세속의 길은 해가 뜨는 길이라면, 종교의 길은 해가 지는 쪽으로 가는 길이다.” 이 말씀을 패러디하면 말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세속]일반, 하나는 [탈속]시문詩文의 길이다. 세속의 말길은 해가 뜨는 길이지만, 탈속한 말길은 해가 지는 쪽으로 간다.”

 

어려울 것도 없다. 속세의 길을 가자면 뭔가를 자꾸 이뤄내야 한다. 성취하고 쌓으면서, 뭔가 만들면서 사람살이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수행자의 길은 다르다. 뭔가를 자꾸 버려야 하고, 허물어야 하며, 짓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불교의 수행자들은 부처도 버리고, 자신의 몸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문학의 길은 세속의 길이 아니라, 종교의 길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속의 말길을 버리고, 잃어버린 아이의 말투를 되찾고, 쌓고 가르며 내치는 말길이 아니라, 허물고 합하며 끌어안는 말길을 걸어야, 그것도 맨발로 걸어야 마땅하다. 그게 시의 말길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유월의 강천산-강천사의 풍경을 두고도 이념 대결로 얼룩졌던, 아픈 역사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도, 여전히, 분단의 상처는 초록이 지쳐 단풍 들 것 같은 자연 앞에서도 냉엄한 숲의 찬바람처럼 우리를 옭죄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문의 시력[視力-詩歷]마저 오독해서는 안 되겠다. 숲의 나무이파리들이 한목소리로 평화와 사랑을 발음하는 초록 세상처럼, 시의 언어 역시 맨발의 언어로 사랑과 평화의 그림을 그려야겠다. 맨발인 채, 회문산 돌아 나오는 나무처럼, 숲의 언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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