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봄이 오면
꽃 피는 봄이 오면
  • 김규원
  • 승인 2023.06.2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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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수필가
김고운/수필가

매화, 산수유가 지고 벚꽃도 피었다가 지더니 복숭이 꽃이 만발하고 철쭉, 영산홍, 자산홍, 명자나무꽃이 흐드러졌다. 울긋불긋 고운 꽃과 연둣빛 새잎들이 피어 세상을 가득 메우는 멋진 계절 봄이다.

내가 좋아하는 풀꽃도 피어 가만가만히 내게 사인을 보낸다. 어서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설 때라고. 풀꽃들의 사인은 보이지 않게,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밀하다.

길을 가다보면 길섶에 가만히 피어 실바람에도 머리를 까닥거리며 어서 오시라고 손짓한다. 다른 이들은 그 까닥거리는 사인을 알아볼 수 없다. 거의 피어있는지조차 알 수 없이 작은 것들이 추위를 이기고 봄 가뭄을 이겨내고 마침내 세상에 나와 내게 사인을 보낸다. 그래서 나는 봄이면 더욱 행복하고 바쁘다.

올봄에는 풀꽃만 아니라 곳곳에 피어있는 작지 않은 관상화와 새로 벋어 나오는 가지와 새순도 모두 촬영하고 있다. 새로 나오는 것들은 모두 예쁘고 간드러진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린 듯 금세 부서질 듯 보이지만, 겨울을 이겨내고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저력을 가졌다.

이 멋진 계절을 위하여 겨울은 내내 찌푸리고 아파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뭔가 거름이 되거나 희생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를 새삼 실감하며 나 또한 그 희생의 시기에 가까웠음을 짐작한다.

풀꽃은 거저 피는 게 아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견뎌내며 작은 꽃을 피워 수정하고 열매를 맺어 익어서 땅속에 묻혔다가 겨울을 나고 새봄이 오면 비로소 여린 싹을 내밀어 모습을 드러낸다. 여리게 자라는 싹도 재빠르게 자라서 꽃을 내려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슬방울을 모아 싹을 틔우고 작은 습기라도 빨아들여 자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작은 풀꽃들의 적응과 한살이는 경이롭다. 어쩌다 조금 내리는 빗물에 씨앗이 움트고 잎이 나오는가 하면 어느새 꽃이 피었다. 꽃이 피었는가 하면 씨앗을 만들어 내고 여분의 물끼가 있으면 다른 가지가 나와 또 꽃을 낸다.

그렇게 그들은 끊임없이 씨앗을 만들어 번식을 거듭하고 널리 퍼뜨려 살아남는다. 그렇게 살아남는 게 바로 부활이지 싶다. 해마다 그들이 남긴 씨앗들이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하고 철이 다 지나면 보이지 않지만, 이듬해 봄이면 다시 그 모습 그대로 예쁜 모습을 자랑한다.

우리가 만나는 꽃들은 다 같은 모양이고 똑같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리네 인간처럼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 다른 유전자를 지닌 개체일 것이다오랜 세월을 건너오면서 환경에 맞도록 적응하느라 모양이 달라지고 크기도 점점 작아진 작은 풀꽃들이다.

그들이 언제부터 지구상에 나왔는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꽃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집을 줄이고 물이나 영양소 소비도 줄여야 했을 것이다. 작아져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작아지고 꽃잎도 홑겹으로 단순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작지만, 앞으로도 이 척박한 환경을 얼마든지 이겨내고 살 수 있도록 적응할 것이다. 겉멋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억제하며 살을 빼고 근육을 줄이거나 부풀리는 인간들과는 다른 생활방식이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그러나 그 작은 꽃들은 남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못된 경쟁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살기 위해, 살아서 많은 씨앗을 퍼뜨려 종족을 유지하겠다는 일념, 생존본능으로 견뎌왔다.

해가 설핏해진 시간, 작은 꽃들은 모두 잎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받아들일 빛이 줄고 작은 곤충들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면 꽃잎을 닫고 고개를 숙인다. 꽃잎을 닫아야 수분 소모가 적어져 물을 아낄 수 있으므로. 작은 꽃들은 날씨가 흐려도 꽃을 열지 않는다.

볕이 따스해서 내놓은 꽃가루가 가벼워지고 꿀이 나와서 작은 곤충들이 찾아오거나 바람이나 다른 방법으로 수정되어 씨앗을 맺을 수 있는 환경에서만 꽃을 연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능률적이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 때도 꽃잎을 닫는다.

허룩한 지갑이 비어가는데도 호기를 부리느라 오마카세를 주문하는 허풍쟁이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한 생존본능을 지녔다. 평생 돈을 모르고 산 나도 풀꽃과 친해지면서 조금씩 절약을 배우고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한다.

생의 끝자락에 뭘 얼마나 아끼고 배울까마는 그 작은 것들의 착한 생존본능을 보며 늦게나마 조금씩 철이 나는가 싶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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