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분실신고
신용카드 분실신고
  • 김규원
  • 승인 2023.06.15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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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풍/수필가
최규풍/수필가

  산악회에서 찾아간 남해 해변을 트래킹하면서 좋은 풍경을 많이 찍었다. 대교 건너로 활어회를 먹으려 사천으로 간다. 차에서 카메라를 보니 잔량이 부족하다. 보조 배터리로 갈아야겠다. 가방 속을 뒤져보니 없다. 어디서 빠졌을까? 아뿔싸, 지갑도 없다. 현금과 카드와 주민등록증이 들었다.

  지갑을 집에다 빠뜨렸나 싶어 손자에게 전화했다. 책상 위에 있는지 물었다. 있기를 바랐다. 없단다. 가슴이 철렁했다. 길에다 빠뜨렸구나. 그럴 리가 없다. 다시 배낭을 뒤져보았다. 확실히 없다. 아내의 어깨 가방을 열고 뒤적거렸다. 아내가 점심때 내 배낭에서 도시락 말고도 무언가 꺼내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가 자기 가방에 지갑을 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기를 바랬다. 왜 가방을 자꾸 뒤지느냐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배터리와 지갑이 안 보인다 했다. 아내가 단박에 힐난했다. 왜 그리 정신이 없느냐. 그렇다. 정신이 빠졌다.

  아침에 배낭이 열렸다고 아내가 말했으니 분명 길에다 떨어뜨린 것이다. 탑승할 곳까지 시간이 없기에 지퍼가 열린 채 뛰었다. 그때 길바닥에 흘린 게 분명하다. 지갑이 빠진 게 아니라 내 정신이 빠졌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천지가 지옥이다.

  주운 사람이 횡재한 거야. 아마 벌써 카드를 긁었을 거야. 수십만 원일까, 수백만 원일까? 혹시 착한 어린애가 주웠다면 학교에서 배운 대로 경찰서나 파출소에 맡겼을까? 주운 이가 어른이라면 사람은 착해도 돈에 붙들려 지폐만 챙기고 지갑은 버렸을까? 여러 장면을 상상하는 데 아내가 빨리 분실신고를 하란다.

 

  직장에서 일하는 아들에게 물었다. 카드 분실신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손가락이 떨린다. 여덟 자리를 누른다. ‘지금은 통화량이 많아서 기다려 주세요.’ 여자 목소리에 이어 음악만 들린다. 배터리가 떨어진다. 끊었다가 조급해서 다시 걸었다. ‘지금은 통화량이 많아서 기다려 주세요.’ 왜 이리 카드 분실한 사람이 많을까? 하기야 나처럼 빠뜨린 이들이 한둘이겠어? 복잡한 세상에 많을 거야. 큰일이다. 이 시간에도 마구 긁을 거야. 다시 핸드폰을 두드렸다. 기계 녹음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통화량이 많아서 기다려 주세요.’ 음악 소리가 이어졌다. 껐다가 다시 걸었다. 세 번 네 번 마찬가지다. 다섯 번 만에 드디어 걸렸다. 남자 직원과 연결되었다. 누군가 긁었는지 물었다. 오늘은 없단다. 그러면 어제는요? 9,300원이란다. 손녀가 시력이 떨어져서 안과에 데려갔었다. , 살았다. 마음이 놓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재발급 절차를 마쳤다. 묻고 대답하고 비밀번호도 헷갈리고 시간이 꽤 걸렸다. 멀미가 났다. 어느새 활어횟집이란다. 배낭을 메려고 무릎 밑을 보니 배낭이 뒤집혀 있다. 전체가 녹색인데 밑바닥은 검은색이다. 자크가 떠오른다. 열었던 기억이 난다. 두툼한 게 지갑이다. 충전용 배터리도 함께 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낭팬가. 분실신고를 한 게 후회스럽다. 배낭의 밑바닥에 넣은 것을 까맣게 잊고 신고했다. 그래도 잘했다. 만일의 경우인 최악을 생각했다. 오늘 실수는 다름이 아니라, 지갑을 평소처럼 점퍼의 속주머니에 넣지 않고 배낭에 넣은 잘못이다. 그것도 배낭 바닥이다. 상의 안주머니에 넣으면 옷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보기에 흉하니 배낭 바닥에 넣었다. 배낭 바닥은 미처 생각 못 했다. 지갑이 땅에 떨어진 게 아니라 내 기억력이 땅에 떨어졌다. 앞가슴이 불거져도 주머니 속에 넣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다.

 

  삼천포 어시장 부두에 섰다. 갈매기가 나를 보고 비웃었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벌써 건망증이야, 치매야? 지갑은 호주머니에 넣어야지? 볼록 튀어나오는 게 뭐가 창피해. 외모에 신경 쓴 꼴이 말이 아니다. 사람은 옷매무새가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부끄럽다. 쓸모없게 된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카드야, 정말 미안하다. 멀쩡한 너를 쓰레기로 만들다니.’

 

  카드 분실신고가 두 번째다. 혹시 치매 전조 증상이 아닐까? 며칠 후 보건소에 찾아가서 치매 진단 검사를 했다. 쉬웠다. 30가지 중 한 문제 틀리니 정상이라고 판정했다. 치매가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건망증이 심한 것이 탈이다. 고령에 뇌세포가 망가지는 것을 탓하지 말고, 되새기고 메모해야겠다. 신용카드 분실신고는 침착하지 못한 경거망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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