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었다
  • 김규원
  • 승인 2023.05.1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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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규 원/편집고문
김 규 원/편집고문

지난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다. 정부는 2019년 2월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했던 1894년 5월 11일을 법정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동학난’이라고 폄훼하던 친일 보수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여러 차례 법정 기념일 지정에 실패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다.

고부에서 1984년 음력 정월에 처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군수 조병갑을 쫓아내고 폐정을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끝날 사건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을 다독이라고 보낸 안핵사(按覈使) 이용태가 되레 농민들을 잡아서 곤장을 치며 모조리 잡아들이려 들자 전봉준은 고창 무장에서 농민군을 모아 3월에 정식으로 관군에 대항하며 썩은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음력 3월에 고창 무장에서 기포한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의 농민군은 부안 백산면에 이르자 8,000명으로 불어났고 음력 4월 전라감영 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날이 음력 4월 7일(1894년 5월 11일)이다. 여세를 몰아 20일 만에 전주성을 함락하고 한 달 만에 새 전라감사와 전주 화약(和約)을 맺어 폐정 개혁을 약속하고 전라도 여러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농민이 지방정치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경험을 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순수한 농민들이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고 분연히 일어선 농민혁명이다. 그야말로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역대 정권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는 한낱 민란 정도로 폄하되고, 극히 일부 사가들만 제대로 평가하고 있었다. 왜냐면 역대 정권의 요직을 친일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일본에 반기를 든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의 호칭이 달라진 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특별법이 제정되면서이다.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동학난’ 이었고 4.19 이후에 ‘동학농민봉기’로, 박정희 정권 때에 ‘동학농민운동’으로 폄하되어 불려왔다. 정권마다 민중이 정부에 대들었던 농민혁명을 곱게 여기지 않았고, 그 뒤에는 일본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일본의 역사관을 그대로 배워 답습하는 사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뒤에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나 근본 사상의 전파는 순탄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이후 9년간 다시 보수 친일 정권이 들어서면서 터덕거렸다. 더구나 혁명의 본거지가 전라북도인 때문에 정부 예산이라는 게 우는 아이 젖 물리듯 찔끔찔끔 마지 못 해 주는 금액이었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기념사업 1곳의 금액보다 적은 액수였다.

2017년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특별법이 개정되고 법정 기념일이 지정되었지만, 기념일 행사도 제각각 열린다. 관련 지역마다 다른 행사 형태와 중구난방식 운영으로 아직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기념사업이다. 당시 외세에 맞서 싸우다 왜병들의 총탄에 희생된 영령들이 오늘의 행태를 보며 지하에서 탄식하고 있을 듯하다. 

동학농민혁명은 단순히 삶에 부대낀 민초들이 지역의 관장에게 대든 정도의 민란이 아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혁신을 농민들이 주도하고 실천한 역사적인 위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촛불혁명의 밑바탕이었다.

동학혁명군이 들고 일어난 원인은 척왜척양(斥倭斥洋)이라고 내걸었던 기치(旗幟)가 말하듯 외세인 일본과 러시아, 미국 등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투쟁이었다. 허술한 봉건왕조와는 타협하여 전주성을 비워주기도 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농민들이 썩어버린 정부를 야금야금 파먹는 친일 세력과 일본의 침략 조짐에 대항하여 싸운 구국운동이었고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최근에 그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예우를 ‘독립유공자’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들고 일어난 을미의병은 독립운동 유공자로 분류하면서 그 한해 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독립유공자로 대우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내규에 동학군이 진압된 지 얼마 안 돼 궐기한 1895년 을미의병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한다는 방침이 정해져 있는 규정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1875년 강화도 앞바다에서 함포 사격으로 조선을 겁박해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시장을 개방하게 하고 조선 정부를 간섭하고 그들의 손아귀에 넣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일본을 몰아내고 자주독립해야 한다고 일어선 동학농민운동은 당연히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연한 말이다. 더구나 을미의병의 주체는 양반과 지주 등 민중 세력이 아니었다. 더구나 양반 기득권 지주(地主) 세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민병대를 구성하여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을미의병은 독립운동으로 보고 동학농민운동은 민란(民亂) 정도로 폄훼하여 ‘동학난’이라고 지칭한 데는 친일 기득권 세력의 역사 인식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우리 근세사에서 자랑할 만한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벼슬아치나 양반들이 주도하지 않은 순수한 기층의 민초들이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어서서 일본군과 싸웠던 거룩한 사건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민중 혁명이 일어났지만, 모두 지역의 귀족이나 관리 출신들이 주도하여 민중을 선동한 혁명이었다. 

오직 동학농민혁명만이 순수한 바닥 민중이 들고 일어나 군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울로 진격했다. 그들은 썩어버린 정부와는 타협해도 일본군과는 총부리를 겨누어 산화하는 길을 택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나라의 근본인 기층 민중이 직접 외세에 항거하여 싸웠던 자랑스러운 투쟁이었고 독립운동이었다. 일본군에 맞서 죽창을들고 대들었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투사였고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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