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렝이질
그렝이질
  • 김규원
  • 승인 2023.04.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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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수필가
백금종 / 수필가

아귀를 꼭 맞추고 서 있는 기둥이 듬직하다. 조금 거칠지만 자연 친화적인 멋이 있다. 고풍스러운 운치도 배어난다. 다른 돌과의 불균형 속에서 조화롭다. 거기에 파격의 미까지 있다. 파격의 미가 가장 격조가 높다고 한다.

석파石坡 이하응도 난을 칠 때마다 파격의 미를 중시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애당초 파격의 미를 고려하면서 돌을 구했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 있었던 자연석을 이용했는지? 모르지만, 8개의 주춧돌 중에서 유독 정 중앙의 돌만 덤벙주초다.

지난 이른 봄 고향을 찾았다. 마을은 온통 봄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대숲 언덕에는 아지랑이가 어른어른 너울거렸고 그 사이로 복사꽃, 매화도 콩만 한 꽃망울을 맺혀놓은 채 봄을 즐기고 있었다. 부지런한 개나리는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고운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다.

마을의 분위기와 다르게 주인 잃은 옛집은 깊은 적막에 빠져있다. 얼룩진 벽면은 바람에 나풀거리고 도리를 베고 누운 서까래도 끄름에 그을린 채 세월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다. 기둥도 옛 기품은 찾을 수 없이 고색창연하다. 매끄러운 주춧돌 위에 서 있는 7개의 기둥은 틀어지고 밑부분도 비바람에 젖어 썩어 가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세월의 격랑을 잊은 채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불룩한 덤벙주초 위에 세워있는 기둥뿐이다.

불룩한 주춧돌. 그것은 나를 회억 열차에 태워 70여 전의 어느 봄날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때 풋보리처럼 생기가 돋아나는 열네 살 소년이었다.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에는 못 치기가 유행했다. 못의 둥근 머리 부분을 매끄럽게 해야 못을 원하는 자리에 꽂으며 상대의 못을 날려 딸 수 있었다. 그래서 불룩 솟아오른 초석 위에 못을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기곤 했다. 아뿔사! 못 머리를 친다는 것이 내 손 등을 내려친 것이다. 피범벅 된 손등을 보고 소동이 났다. 겨우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 돌은 커다란 바위처럼 평생 뇌리에 남아있다.

이 집은 내가 이 세상에 고고성을 지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몇 달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손수 주춧돌을 구해서 깔고 기둥을 세웠다. 더욱 심혈을 기울인 것은 불룩한 주춧돌(덤벙초석) 위에 세우는 기둥이었다. 불룩한 초석의 모양 따라 기둥의 밑면을 톱으로 자르고 자귀로 깎아 내고 끌로 파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렝이질 끝에 겨우 기둥을 세울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매사에 깐깐했다. 작은 일이라도 완벽하게 처리해야 다음 일로 넘어갔다. 조금만 맘에 들지 않으면 날밤을 세면서라도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평생에 처음 짓는 집인데 오죽했으랴. 입에 풀칠도 버거운 시절, 자재를 구하고, 손수 대목 일을 하면서 인건비까지 마련하려니 신경이 곤두섰지 싶다.

할아버지보다 더 고달픈 것은 할머니였다. 연약한 아내로서 불같은 성미인 지아비의 뜻을 받 드느라 쓴 내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동살이 떠 오르면 부스스한 잠을 떨치고 집짓는 터부터 둘러보고 부엌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니 그렝이질 하기보다 더 어려웠을 테다.

집들이할 때 막걸리 한 잔에 얼큰해진 할아버지는 지나간 고통은 잠시 잊고 할머니를 끌어안으며 어화 둥둥 내 사랑이로구나하고 춤추며 기뻐했다니 보기에는 무뚝뚝해도 내심 살가운 정이 넘치는 그 시대의 장부였지 싶다.

그렝이질은 기둥을 세울 때나 부재와 부재가 만날 때만 필요한 기법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요긴하게 쓰인다. 우리 내외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질을 닮아서인지 은연중에 그렝이질이 대물림되고 있다.

젊은 시절, 나를 중심으로 가정 열차가 운행되었다. 아내는 언제나 내 형편에 보아가며 출발하고 종착역에 다다르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심 축이 달라졌다. 아내가 키를 잡은 열차에 내가 역무원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여보 할 일 없어?” 

봄볕에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아내에게 넌지시 건넨 말이다가정이란 덤벙주초 위에 서로 남고 부족한 곳을 메워가며 그렝이질 한 기둥을 세워 평화와 안정이 새순처럼 돋는다면 나름 보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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