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석조각 무형문화재 김옥수(55) 명장 작품전시회
<기획>석조각 무형문화재 김옥수(55) 명장 작품전시회
  • 고재홍
  • 승인 2008.12.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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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석조각 무형문화재 김옥수(55) 명장 작품전시회



-익산돌문화축제 등 석재문화발전에 지대한 공로
-익산세계돌문화프로젝트도 입안해 실현케 해
-온종일 1천여 인파 몰려, 작품 150여점 감상



2006년 11월 전북도지사로부터 무형문화재 제36호 석장(石匠:석조각) 보유자로 인정서를 받은 김옥수(55) 명장의 '시연회(試演會) 및 작품전시회(이하 전시회)'가 구랍 29일 사업장인 익산 금마4거리 '일심석재' 마당에서 하루종일 개최됐다.


관련규정에 따라 무형문화재에게는 매년 의무적 행사로 오전 10시부터 개최된 전시회는 행사 두 시간전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해 밤중까지 무려 1천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문화계 인사와 지인들이 다녀가 평상시 처세와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게 했다.


"아무리 모함이 난무하고, 거짓이 진실을 능멸해도 영원히 진실을 감출 수 없듯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수많은 열매를 남긴다"는 것을 입증하듯 수백평 야외 전시장은 150여점 작품과 함께 온종일 축하객으로 넘쳤다.



행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석공예 명장이자 전북도 석조각 분야 무형문화재인 김옥수 돌문화보존회장으로 재작년까지 단돈 8천만원에 돌문화축제를 배산체육공원에서 개최해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했으며, 세계돌문화프로젝트를 입안했던 장본인이다.


이날 행사에는 인도 이인호 선생과 김복현 익산시문화원장, 임화영 명창 등 수많은 문화계 인사는 물론 언론인, 교수는 물론 멀리 백양사와 범어사 주지를 비롯 서울, 부산 등 경향각지에서 엄청난 지인들이 몰려 100여개 화환과 화분으로 가득찬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김옥수 명장은 1954년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금릉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촌생활이 그렇듯 땔감을 하던 일, 벼와 소먹이 풀베기, 무동력선을 타고 주꾸미와 낙지를 잡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누가 부자집 부모를 선택할 수 있으랴. 가정형편은 김씨의 중학 진학을 허락치 안 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를 나이인 13세에 상경해 오직 먹고살기 위해 동대문구 망우리에서 석재기술을 배워 40년간 석재기능인의 길에 들어선다.

하고픈 공부를 못하니 친구를 보면 부러움과 좌절에 빠지기도 했으나 무거운 쇠망치로 돌을 깨며 "이것도 공부다"라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배웠다.


작품에 실수나 오작도 있어 스승에 무거운 쇠자로 맞는 것도 많았다.


"먹는 것도 부실해 배고픔과 서러움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라는 김씨는 고달픈 세월을 보내며 기술을 다 배우고 인생진로를 오직 석공이라 여기고, 작품이 타인에 인정받을 때 힘들던 과거도 점점 잊혀졌다.
어떤 일을 맡겨도 열성을 다해 책임완수로 칭송도 많았으며 20세 때 돌 다루는 기법이 타의추종을 불허해 김씨에 일을 맡기려는 모셔가기 경쟁도 벌어졌다.
75년 석공인이 아닌 '김옥수'라는 한 인간으로서 기회가 왔다.
국제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한 것.
“시련을 딛고, 열심히 노력하니 돈도 벌고, 작품도 남기는 참 좋은 직업이다 싶더군요"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엿볼 수 있다.
김옥수씨는 신형공구 개발에도 몰두해 1976년 현재 사용하는 정을 연구 개발했다.
정의 날 부분에 당가루(중석)를 접착시켜 굳기와 강도 향상으로 작업능률 증대와 석공인 기능향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현재 즐겨 사용되는 수공구, 에어공구, 전동공구 등이 보급됐다.
특히 김씨는 질 좋고 뛰어난 황등석으로 유명해 ‘돌의 고장’이라는 익산에서 능력을 발휘하려고 1984년 이사를 와 정착했다.
그의 석재인 역사에 돌파구가 열린 것. 석재도시 익산의 석재인과 기술교류, 석재연구 등 활동을 하다 1988년 일심석재를 설립했다.
김씨는 일본 오사카에 석조각품 및 석공예품을 수출해 외화획득도 했다.
일본 석재문화를 연구해 수출품 가치를 높이려 1986년 오사카에서 석조각 기술연수도 했다.
오사카 석재공단에서 1년간 체류하며 일본 석재기술과 석조예술을 연구했다.
김씨는 한국 불교문화에 맞는 불상과 석탑 등 석조각 이론과 기술을 체계화했고, 한일 석조예술을 비교 검토하며 석조각 차이점을 집중연구했다.
2001년 ‘대한민국 석공예명장’에 이르자 힘들었던 과거가 자랑스런 석공예 후예로 성장케 한 동기였다고 여겨졌다. 현재 한국 석공예 명장은 15명 정도에 불과하다.
일심석재는 전국 각종 조형물 및 전통사찰공사와 국가시책인 납골묘, 조경공사와 건축석 기타 석재분야에서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많은 기능인 배출과 대회입상, 국가기술자격증을 획득하고 석재수출로 외화를 획득했으며, 전국 사찰공사를 도맡았다.
창업 후, 20여가지 납골묘를 개발해 '의장 및 실용실안 특허'로 불황을 타개하나 요즘 경기가 어려워짐을 느낀다고.
익산시에는 20여개 석산과 4백여 석재업자가 있는데 종업원과 관련산업 가족을 합치면 거의 1만명에 달한다.
김씨 등이 주축을 이뤄 익산이 '돌의 고장'임을 알리며, 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91년 '돌문화보존회'를 발기해 근년에 사단법인화해 김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97년부터 돌문화축제를 개최해 재작년 제10회 전국돌문화축제를 김씨 주도하에 배산체육공원에서 발 디딜 틈이 없이 성황리에 개최했고, '익산세계돌문화프로젝트'도 사실 그가 4년전 기획. 입안한 것.
이 같은 김씨에게 전북도는 2006년 11월, 무형문화재 제36호 석장(石匠, 석조각) 보유자로 인정서를 발급했다.
대한민국 두 번째이자 전북 최초 석조각 무형문화재가 탄생한 것.

이에 관련규정에 따라 해마다 의무적으로 벌여야하는 '석조각 전시회'를 지난해 12월 29일 개최한 것.
여기에는 오석(烏石)을 판석으로 만들어 '매란국죽' 사군자를 예술적인 모습으로 무형문화재 낙관과 함께 양각하는가 하면, 십이지신상을 세 벌이나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1/4 축소작품, '우주와 탄생'은 물론 현대적 조각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150cm 크기의 여인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금산사에 안치될 몸체만 7.5m, 연화무늬 좌대 1.5m, 그 아래 팔보신장이 3.5m에 달해 높이만 12.5m에 이르는 대형 '지장보살'에 제주도 법화사에 세워질 6.5m 높이의 '청해진 장보고비'는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심각한 경기위축에도 전국에 다양한 인맥을 갖은 김 명장은 명성과 인품을 아는 이가 많아 그런대로 주문이 적지 않게 몰린다.

예상보다 많은 축하객이 몰려 행사용으로 마련한 돼지 두 마리가 저녁쯤 바닥이 날 정도였는데 참석자들은 초청가수와 함께 온종일 여흥을 즐기며 작품을 감상하고, 한 해를 마무리 하기도.

더욱 "한국 축소형태 지역에 석재품을 전시하는 세계적 '석조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그가 아사달과 미륵사지 및 왕궁탑으로 대표되는 찬란한 석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후배양성과 전통석조문화 수호를 위해 무형문화재이자 명장으로써 앞 길이 더욱 창창해지길 소망하며 발길을 재촉했다./고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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