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현재 발효 중
내 인생은 현재 발효 중
  • 전주일보
  • 승인 2021.09.16 16:5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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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김 영 숙/수필가
김 영 숙/수필가

바람이 애써 숨겨놓은 흰 머리카락을 어수선하게 헝클어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내 나이 쉰일곱, 어느새 내 얼굴에 어울리는 머리형보다는 머리숱이 더 많게 보이는 머리 스타일을 고집하거나 흰머리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바람처럼 빨리 지나가는 세월인 줄도 모르고 바삐 살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희끗희끗 흰머리가 정수리를 점령한 낯선 여인이 서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 것이 그뿐이랴. 한때는 퇴근하면 집안일이 첩첩이 쌓여있어도 식은 죽 먹기로 해치우고 더 할 일이 없나 두리번거렸는데,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귀찮아서 눈에 보이는 일거리도 슬슬 미루고 드러눕기 일쑤다. 어쩌다 밀린 숙제하듯 일을 해치우면 밤새도록 끙끙거리다 잠 설치는 날이 많다. 금방 해놓고 잊어버리는 건망증은 일상처럼 흔한 일이고 이유 없는 우울증이 몰려와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면서 그저 그러려니 한다. 요즘엔 안경과 안경집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야 한다. 갈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시력이 떨어져서 안경은 내 몸 한 부분이 되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나이 들긴 들었나 보다. 나도 한때는 펄펄 날았는데하며 다시 우울해지려 할 때면, 그냥 인생이 한 단계 한 단계 발효되는 과정이겠거니그리 믿으며 나를 다독거린다. 발효되면 이로운 게 많다. 반면에 썩어 가면 주변에 고약한 냄새만 풍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발효되는지 부패하는지 스스로 냄새를 맡으며 삶의 고랑을 잘 타야 아량이 늘어 좋은 노년을 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발효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 아닌가?

스무 살쯤에는 바삐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서른 살쯤에는 사는 일에 허기져서 어릴 적 꿈같은 것은 가물가물 잊고 살았다. 그리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부록처럼 남은 세월을 덤으로 살아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왕 별책부록 같은 시간이라면 꽤 괜찮은 내용이 가득 찬 부록을 남기고 싶은데 마음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우리의 그 어떤 소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흘러왔던 그만큼씩만 냉정하게 우리네 삶을 유유히 지나갈 뿐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점점 젊어지는벤자민 버튼’, 그가 사랑하는 여자데이지와 평생의 시간이 어긋나게 되는 슬프고 신비로운 사랑을 그린 판타지 영화다. 주인공은 모든 사람이 겪는 함께 늙어가는 것을 하지 못했다. 주름진데이지의 눈가를 보며 사랑의 눈빛을 보이지만, 20대의 육체를 갖고 50대의데이지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속옷 사이로 늘어진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시선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 내지는 상실감을 목격하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금방 깨닫는다.
삶은 시간이 거꾸로 가든 똑바로 가든 사랑할 때 사랑하고, 절정을 맞을 때 절정을 맞으며 정상 궤도를 도는 게 무난한 삶이 아닐까? 삶이 누적되면 될수록 세월의 체감속도는 빨라지게 마련인데, 늘 젊음만 유지되길 바라는 욕심에 가속이 붙어 행여 제동장치라도 밟는다면 적응 못 한 우리의 몸은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 무리하게 차선을 변경한다면 종착지도 잃은 채 이리저리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혹여 방황하다가 잠시 감속이라도 할라치면 뒤에서 달려오는 자들에게 폐라도 끼칠까 염려되어 삶의 손잡이를 놓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게 인생이 아니든가. 요령 피우지 않고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자연히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백미러를 보는 요령도 터득하며 그 속에 비치는 내 모습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것이 연륜이라고 짐작한다.
천하일색 양귀비도 비켜 갈 수 없었던 게 세월이다. 제아무리 보톡스에 호르몬 주사, 첨단의학의 힘을 빌려 회춘을 꿈꾸어본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 않던가. 세월의 벽에 기대어 지나온 쪽 창을 열면 투박한 찻잔에 남긴 커피 향 같은 삶의 흔적이 일렁인다. 인생이란 리필 받을 수 있는 커피잔 같은 것이 아닌 걸 어쩌랴. 내 머리카락에 은색이 점점 늘어간다 해도지금은 인생이 맛있게 발효되는 중이구나!' 그리 여기며 오늘도 일터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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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 2021-09-16 19:57:54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그런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윰짱짱 2021-09-16 18:09:46
삶에대해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글이었어요~
언제나 공감되는 글 감사합니다

주민맨 2021-09-16 18:01:43
인생이 맛있게 발효된다는 말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