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선배를 보면
S 선배를 보면
  • 전주일보
  • 승인 2018.08.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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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이 희 석/수필가

지난주 화요일 S 선배로부터 점심이나 먹자는 연락을 받았다. 별생각 없이 약속한 음식점에 들어가는데, 낯선 일가족이 현관에서 반갑게 맞이한다. 의아한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서 보니 S 선배가 곱게 차려입고 중앙에 앉아 있다가 어서오라며 반긴다. 무슨 일인지 싶다가 이내 짐작이 되었다. 선배의 팔순 생일에 모인 사람들이고 나를 맞이한 가족은 15년 전에 미국에 이민 갔던 선배의 아들 내외와 예쁜 두 손녀였다.

선배의 아들은 성대한 팔순 잔치를 해드릴 생각으로 큰맘 먹고 귀국하였지만, S 선배가 초대한 이에게 부담을 준다며 한사코 말렸다고 한다. 의논 끝에 가벼운 점심 한 끼로 축하의 마음을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

50여 명의 손님과 선배의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인 S 선배는 아이들과 손님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같이 먹지 않느냐고 물으니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며 인자한 얼굴로 미소만 짓고 있다. 선배의 마음엔 자신의 생일상을 다정한 사람들과 아들 가족이 함께 나누는 정경을 보며 마음 가득 행복이 차올랐을 것이다.

그 순간 S 선배의 흐뭇한 얼굴에 내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져 떠올랐다. 어릴 적 어느 날, 밖에서 놀다 허기져 돌아온 나에게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신 어머니는 내가 먹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다. 허겁지겁 정신없이 먹다가 언뜻 고개를 들며 어머니는 왜 안 드시느냐고 물어보았다.

“난 밥하면서 이것저것 집어 먹었더니 배가 부르구나. 나는 너 먹는 것만 보아도 배불러…….”라고 하셨다. ‘마른 논에 물이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라는 옛말처럼 어머니는 당신보다 자식인 내 입에 무엇이든 더 넣어주고 싶어 하셨다. 해마다 반복되는 보릿고개에 송기(松肌)를 벗겨 죽을 쑤고, 둑새풀 씨앗을 훑어 빈 입을 달래주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자식과 남편에게는 꽁보리밥이라도 한 술 먹이기 위해 가는 허리를 자꾸만 졸라맸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을 딛고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어떤 며느리가 남편에게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니 우리 엄마는 고등어 대가리만 좋아하신다고 했더니, 며느리가 시장에 가서 고등어 대가리만 구해다 대접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자식들은 그렇게 어머니를 모른다. 어머니는 안 먹어도 배부르고, 힘든 일도 잘하는 사람이고, 아픈 데도 없는 철인으로 알았다.

내 아내도 그런 희생이 몸에 배어있다. 내가 고등어구이를 좋아하므로 가끔 아내가 구워 놓는다. 그때마다 몸통은 내게 다 준다. 내가 미안한 마음으로 같이 먹자고 하면 아내는 “생선은 머리 쪽이 맛있는 것도 모르느냐?”라며 대가리를 차지한다. 어두일미(魚頭一味)라는 말은 고등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머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아내, 그녀의 희생이 있었기에 내 가정이 지켜졌고 오늘도 내가 건강하게 수필을 쓸 수 있음을 안다. 아내와 S 선배, 이 땅의 모든 어머니여! 진정 고맙습니다.

 

일주일 후 삼락회 사무실에서 S 선배를 만났다. 이틀 전에 아들과 며느리, 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시기에 허전하지 않냐고 물었다. 떠난 다음 날 아침에는 갑자기 세상이 적막하게 느껴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금세 손녀들이 “할머니!”하고 부르며 문을 열고 들어올 듯하고 말하고 웃고 떠들던 모든 모습이 눈에 밟혀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단다.

그러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내

“그립지만 외롭지는 않다. 외로우면 바보지.”라고 말을 바꾸었다. 무슨 의미인지 의아한 마음으로 연유를 물어보니 아들이 미국에 도착한 후 이틀 만에 네 번이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언제나 변함없이 일주일이면 네댓 번씩 안부 전화를 걸어오니 바로 옆에 사는 것처럼 든든하단다. 국제 전화라서 요금이 많이 나올까 봐 전화 좀 줄이라고 말할 때마다

“엄마 목소리 들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몰라요. 전화 좀 하기로 무슨 대수겠어요? 별거 아니니 염려하지 마세요.”라면서 전화를 걸어와 때로는 한밤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 옆에서 자는 의자매가 깜짝깜짝 놀라 일어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S 선배는 그동안 아들네 뒷바라지를 하면서 집도 줄이고, 차도 사지 않고, 체면도 버렸다고 한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놓고 가벼운 배낭여행처럼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S 선배의 모습에는 지난 세월을 견뎌 온 이 나라 어머니들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채움보다는 비움이 삶의 끝을 보람차고 아름답게 한다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가족과 더불어 자신을 잘 조율해가는 여자, 어떤 상황에서도 그 속에 숨겨진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 자기 것으로 삼을 줄 아는 여자, 그리고 볼 때마다 밝고 명랑해서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며 주위 사람들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하는 여자가 바로 S 선배다. 그녀는 보기만 해도 즐겁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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