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에 마신 설주(雪酒)
식목일에 마신 설주(雪酒)
  • 전주일보
  • 승인 2018.05.1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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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문 광 섭 / 수필가

이른 아침부터 초여름 날씨가 기웃거렸다. 옛 직장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상쾌했다. 덕진공원 호반 길을 지나니, 담장을 걷어 내고 만든 산책로에 핀 봄꽃이 환한 얼굴로 방긋방긋했다. 아직은 아침잠이 덜 깬 듯 보였다. 50년 전, 긴장한 모습으로 처음 출근했던 낯익은 건물이 나를 보자 반색하였다. 외벽에 드리운 담쟁이 넝쿨에선 반세기를 보낸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장롱이 보여주던 은은하고 윤기 나는 빛깔처럼 고색창연한 건물은 마치 고향 집 안방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젊은 날 간간이 깊은 대화를 나눴던 J대 구 본관 앞마당 고목이 나를 알아보고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아 눈만 깜박거렸다. 나를 기억해주는 반가움에 목이 메어서였다. 매일 아침 만났고, 내 젊은 날의 애환을 소상히 기억하는 친구지 싶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중앙로 양쪽에 늘어선 히말라야삼목 수십 그루가 나의 사열이라도 받으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환호를 울렸다. 1972년, ‘전국교육자 대회’를 앞두고, 식목일을 전후하여 건지산에서 데려온 친구들이다. 45년의 짧지 않은 풍상 속에서 겪었을, 민주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뜨거운 함성과 열기를 온몸에 받았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눈빛만 붉히는 의연함에서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아! 위대한 증인들이여!

 

돌아서려니 뭔가 허전함이 내 미간에 어른거렸다. 가만히 떠올려보니, 그 행사를 기념해 심었던 기념 수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낯선 건물이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문득, 식목일에 얽힌 추억 하나가 새록새록 피어났다.

 

1970년 4월 5일, 식목일의 일이다. 그 시절엔 산림녹화가 식량 증산 다음의 국가시책이었기에 식목행사를 기관 단위로 크게 하던 시절이다. J 대학도 건지산 일대의 실습임야(공원)에 편백 등 상록수를 심으려고 묘목과 농주까지 준비했었다. 한데, 밤사이에 때 아닌 눈이 10cm나 내렸고, 기온도 뚝 떨어졌다. 식목행사는 자연 연기되었으며, 아침부터 농주를 마시게 되었다.

 

당시 직장 내에는 30세를 전후한 젊은 층 10여 명이 ‘첫눈 오는 날을 기념하여 술을 마시는 설주(雪酒)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니 공식 행사를 갖자 하여 전주역(현 시청사) 앞 단골집으로 몰려가 대낮부터 거나하게 마시면서 때 아닌 첫눈을 자축했다. 그때, 전주역으로 들어오는 여수행 준급행열차가 연신 기적을 내질렀다. 제일 연장자인 L 형이

“우리, 여수 오동도에 가서 한 잔 더하자! 빨리 저 기차를 타!”라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 역을 향해 뛰었고, 차에 오르자 이내 곯아떨어졌다. 소란스러움에 눈을 떠보니 여수역이었다. 아니, 그곳은 봄이 한창인 별천지였다. 제방에 부서지는 파도와 하늘을 나는 갈매기, 뱃고동 소리와 함께 여울지는 풍광에 도취한 우리는 ‘동백 아가씨’를 열창하며 오동도를 향해 걸어갔었다. 48년 전의 아련한 추억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장소인 대학 정문에 이르렀다.

 

J대에서 30여 년간 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 가운데 퇴직한 뒤에도 12명이 격월로 만나 우의(友誼)를 나누는 모임이 학지회(學旨會)다. 70세를 전후한 연배로써 40년 넘도록 정 붙이고 지내다 보니, 형제나 다름없는 끈끈한 사이다.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자 하여 여수 오동도로 가게 되었다. 한때는 덕진 캠퍼스를 누비던 용사들이다. 한데, 백발에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돋아 있으니 세월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5인승 버스에 올랐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 했던가! 건네는 말마다 귀에 익은 소리요, 감칠맛 나는 추억거리를 안주 삼고 즐기다 보니, 여수에 가는 내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해상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오동도를 비롯한 엑스포 기념관, 거북선 대교, 장군 섬, 내항, 돌산대교, 이순신 광장 등을 돌아보고 돌아와 푸짐한 해산물로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광어, 우럭 등 여러 가지 어종이 올라왔으나 내 젓가락은 해삼, 전복, 멍게, 낙지로 연신 갔다. 아직도 회(膾)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설주를 마시던 젊은 날의 추억 속 입맛이 그대로 남아서다. 소주 한 병쯤 마셨을 때, 취기가 돌자 또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설주를 마셨던 사람은 이 자리에 나 혼자라 생각하니, 초장 속의 회 한 점처럼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인생 지사 남가일몽(人生 之事 南柯一夢)’이라는 옛말이 가슴에 스쳤다. 남은 세월 헛되이 살지 말고,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일었다.

 

그때, 연배인 P가 “술 먹다 말고 뭐 하고 있어!”라는 바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오랜 친구들과 친근한 담소와 우애를 나누다 보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하고, 즐거움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추억 어린 여수에서 된장 항아리 속 장아찌 같은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며 그동안에 쌓인 회포를 풀다 보니, 한나절로는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 하루였다.

 

첫눈이 내리면, 나이를 불문하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며 마음이 설레지 싶다. 더구나 술꾼들은 핑계가 없는 판에 눈이 오니 얼마나 쾌재를 부를지 주당만이 공감하는 심사이리라.

올겨울 첫눈 오는 날, 오늘 만났던 친구들을 불러내어 설주 한 잔을 권하면서 그 옛날의 추억담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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