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노인으로 살아가기
이 시대의 노인으로 살아가기
  • 전주일보
  • 승인 2018.01.1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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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 / 편집고문

한반도를 꽁꽁 얼어붙게 했던 한파가 한풀 꺾여 조금 지낼만하다. 하긴 미국 동부에 몰아친 영하 40도, 체감온도 70도의 추위에 비하면 추위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말이다. 기온이 좀 풀리면서 얼어붙었던 눈이 녹느라 도로가 엉망이다. 질척거리는 소로를 운전할 때는 운전자들이 조금씩 서행을 하면서 주변에 더러운 물이 튀지 않게 조심해주었으면 싶다.

지난 주일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남북이 판문점 연락망을 복원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참가 문제를 합의하는 이외에도 문화예술단의 교류 등 화해의 물꼬가 터졌다. 오랜만에 미국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는 과정을 보며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다.

마치 한반도를 덮고 있던 북극한파가 물러가고 평상기온을 회복하는 날씨처럼 반갑다. 그동안 이상한 집단이 권력을 말아 쥐고 저희들 편리한대로 국정을 뒤흔들어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와 비교하면 마치 시냇가 버들개지에 새움이 돋은 것을 보는 듯하다.

물론 최근의 변화를 두고 섣불리 북한의 태도 변화니, 핵전략의 수정이나 포기를 짐작할 일은 아니다. 연이은 도발로 외부와의 통로가 막힌 그들이 한 민족인 남한과 대화의 창구를 여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본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민족동질성을 내세워 우리와 대화를 재개한 일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국제관계에서 ‘코리아 팻싱’이라는 치욕을 당해왔던 걸 생각하면 미국이 골치를 앓는 북한문제가 우리의 주도로 풀어질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부의 노력에 반기를 드는 터무니없는 무리들의 생떼가 등장했다. 지난 여러 정권에서 외교라인에 종사하던 자들이 원로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자주외교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에 책임을 묻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문정인 외교안보특보 · 강경화 외교부장관 해임을 요구했다.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 등 전직 외교관 58명이 11일 “대한민국의 외교안보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행위를 중단하고, 학자의 탈을 쓰고 종북 행각하며 한 ‧ 미 ‧ 일을 이간시키는 청와대 외교안보특보를 즉각 해임하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로지 미국과 일본에 매달리는 게 외교이고 나라가 사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산 인물들이고, 그동안 촛불혁명을 반대하면서 박근혜는 죄가 없다고 석방하라는 태극기집회에 나갔던 인물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수구꼴통의 집단이 외교 원로라는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한 것이다. 대부분 뉴스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사소한 일이지만, 흔히 원로라는 이름에 현혹되는 이들이 많은지라 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또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외교관 가운데 13명이 비외교관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외교를 망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교부 정통관리들의 밥줄을 걱정하는 충정을 이해가 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30명이 넘는 비외교관 출신을 해외 공관장에 임명할 때는 찍소리도 않던 그들이다. 심지어 최순실의 명에 따라 중소기업 사장출신이 베트남 대사로 임명된 일에도 말 한마디 없었다.

걱정하는 일은 아직도 이런 전직 외교관뿐만 아니라 각계에서 무도한 정권이 흘리는 단 꿀을 빨며 호사하던 인물들이 도처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독재시절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박정희도 ‘임금’이라고 주장하는 노인이 있듯이, 배고픈 시절의 두려움을 떠올리며 독재의 추억 속에 사는 노인들이 상당수 나라의 내일을 정하는 투표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시간은 앞으로 나가는 자의 편이다. 뒤를 돌아보고 그 자리에 머물러 안주하려는 자에게 희망은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노인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지키고 머무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내일을 정하는 일이 더는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IT시대의 사물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를 망라하는 ICT시대에 적응하기 위하여 초등학생에게도 ‘코딩’을 교육하는 시대다.

늘어가는 노인층을 부양 또는 그들의 세금으로 노인복지를 진행하게 하려면 젊은이들이 시대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걸 위해서 일찍부터 어린 아이들에게 데이터 처리나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변환하는데 필요한 코딩을 가르치는 것이다. 코딩은 말할 것 없고 스마트폰을 그저 ‘손에 드는 전화기’ 정도로만 쓰는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장래를 결정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지난날의 어른이나 노인은 지혜를 담은 근엄하고 권위가 넘치는 존재였지만, 오늘날의 노인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 박물관에 전시된 찬란한 유물이 아니라, 시대와 맞지 않는 처치 곤란한 삐걱거리는 가구에 불과하다. 지난 시대의 1세기에 이루어진 기술적 변화가 지금은 단 몇 개월에 이루어지는 시대다.

노인도 깨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이해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첨단화된 서울의 아들집에 갔다가 베란다에 갇혀서 아들이 올 때를 기다렸다는 웃픈 이야기는 이미 현실이다. 시대를 배우고 적응하는 노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자. 아울러 지자체도 노인의 추억이나 건드리는 교육이 아닌, 시대를 가르치는 노인교육에 힘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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