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보행기
어머니의 보행기
  • 전주일보
  • 승인 2017.04.0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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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금종 / 수필가

어디 지난날에야 그랬던가? 삼 십리 자갈길 시골 장을 바람처럼 내 달렸던 다리였다. 한 수레 족히 되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서릿발 새벽길에 열기를 내 뿜던 화차였다. 그러나 이제는 굽고 닳아진 다리가 좀 먹은 삭정이처럼 푸석하다. 아프지 않은 곳 없고 시리지 않은 마디가 없다. 세월이 가져다 준 삶의 옹이임에 틀림없다. 물 흐르듯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나 되돌릴 수 없는 강물이다. 텅 빈 가슴속엔 찬바람만 휘돈다.

어머니는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려면 보행기에 의지해서 걷는다. 노쇠한 몸은 물론 마음도 싣고 정까지 담고 다닌다. 비록 인간처럼 따뜻한 정이야 없지만 한시도 멀리해서는 안 되는 동반자다.

따뜻한 햇볕이 마당위로 포근하게 내리쬐면 어머니는 보행기를 찾는다. 한낮에 졸다 깬 보행기가 어머니를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마당도 거닐고 동네 마실 길도 나선다. 봄나물이 색시처럼 수줍은 얼굴을 내밀면 어줍은 손놀림이지만 옛이야기를 더듬듯 쏙쏙 뽑아서 푸성귀 곁들여 밥반찬을 마련한다. 어머니의 굽은 등위로는 훨훨 나비가 날아와 앉고, 검돌박이 강아지도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따라다닌다. 어머니는 나비와 강아지와 한 나절 친구가 된다. 봄볕이 내려 쬐는 마당가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당신의 삶을 채색하는 또 한 장의 수채화를 그린다.

보행기도 어머니만큼이나 낡았다. 푸른빛 치장에 견실하던 모습은 옛말. 뼈대는 여기저기 쩍쩍 금이 가 있고, 철사로 마디마디 얽어매었다. 바퀴는 철없는 아이처럼 멋대로 구르고, 손잡이도 느슨하여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요리 밀고 저리 비틀면서 달래면 겨우 움직여 준다. 숙련된 어머니의 솜씨로 다스리니 그나마 가능하다.

“어머니 보행기를 교환해야겠어요.”

“아니야, 바꾸기는 뭘 바꾸어? 그럭저럭 사용하다 죽으면 말제.”

삶에 미련을 놓은 듯 처연한 그 말씀이 내 마음을 파고든다. 그러다가 고향을 찾은 손녀의 애교에 부럼처럼 단단한 고집이 봄눈 녹듯 풀렸다. 최신제품 보행기와 휠체어를 사드리며 잘 쓰시라는 손녀의 신신당부에 미소가 얼굴가득 번졌다. 그러나 아랑 곳 없다. 손녀의 앞에서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마루에 신주처럼 모셔 놓았다. 삐걱삐걱 구닥다리가 여전히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친구도 오래된 친구가 참 친구요, 장도 오래된 것이 진한 맛을 품고 있다더니, 아마도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것은 그래도 고물 보행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삶은 우리들의 보행기였다. 몸을 의지하는 보행기처럼 당신은 자식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한창이던 나이에 이승을 하직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채보다 무거운 짐을 얹고 삐거덕삐거덕 세상을 굴러간 보행기였다.

제철마다 거둔 푸성귀를 도회인의 식탁에 올리고, 질퍽한 논바닥에서 걷어 올린 볏단도 자녀들의 눈을 띄우는 데 바쳤다. 베틀위에서 젖꼭지를 물린 채 부르는 자장가는 밤의 적막을 지우는 아리아가 되었고, 긴 밤 고독은 실과 함께 물레에 감아야 했다. 고단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시시포스의 바위였다. 외줄타기 곡예를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몸으로 그렇게 키운 8남매 자식을 품안에서 다 떠나보내고 당신은 낡은 보행기처럼 부서지고 휘어져 삶의 끝자락을 더듬고 계신다.

어머니는 허리가 휘고 손발이 닳도록 농사를 지어 자식들에게 보내는 재미로 살았다. 그러다가 칼바람 겨울에 쌀을 싣고 돌아오던 경운기에서 떨어져 어깨뼈와 엉덩뼈가 바스러지는 수난을 당했다. 남편을 떠나보낸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온몸을 하얀 붕대로 휘감은 백색인간이 되었어도 남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현명하지 못했던 당신을 탓할 뿐. 아픔을 이겨내며 한 발자국이라도 더 떼어보고 굴러보려는 의지는 보행기의 본능과 같았다. 이를 깨물며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가 있는 자식들엔 내색한번 안하셨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상처의 흔적들을 감춰두었던 보석처럼 내보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끼리야 말 할 것 없고 감정이 없는 무생물 사이에도 그렇다. 하찮은 풀 한포기로 생명을 구할 수 있고 볼품없는 돌 한 조각도 주춧돌로 쓰일 때가 있다. 우주만물이 알게 모르게 정을 주고 연을 맺으며 존재 한다. 마당 한구석에 소리 없이 자리하고 있다가 어머니의 부름에 기꺼이 나서는 보행기, 얼기설기 동여맨 몸으로 어머니의 동반자가 되고 친구가 되어 고맙다. 따스한 햇살이 어머니의 굽은 등에서 보실거린다. 어머니의 얼굴이 해맑다.

 백금종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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