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언론이 반성해야할 일
韓·日 언론이 반성해야할 일
  • 전주일보
  • 승인 2011.11.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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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가리켜 무관의 제왕이라고도 하고 권력의 제4부라고도 부른다.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있는 요체는 대체적으로 언론의 힘이 크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는 쌍두마차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언론의 자유도 없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의 언론은 무관의 제왕도 아니고, 권력의 제4부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자유스러운 민주주의 국가에서만 언론은 꽃을 피운다. 강력한 독재정권은 아예 국민의 귀를 틀어막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 눈도 보지 못하게 검은 안대로 막아둔다.

유신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한 다음 검은 잉크로 X자를 그려 넣어 다녔던 일이 엊그제 같다. 입을 벌려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상징적인 표시를 했던 것이다. 요즘에는 정규 언론을 넘어서는 인터넷이라는 요물이 생겨 누구라도 자신의 입장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물론 개인의 행동에 불과하지만 지명도에 따라서 많은 팬이 있어 훌륭한 언론 구실을 한다. 컴퓨터에서만 가능하던 것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이를 대신할 수 있어 그 기회는 무한정 너른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오프라인에 의한 신문과 동영상을 띠는 TV에서 알고자 하는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신문과 방송은 그만큼 신뢰성이 크고 한꺼번에 수백만, 수천만에게 실시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재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과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지난번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쓰나미는 이를 시청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줬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해일이 밀려드는 현장 모습은 공포와 전율을 동시에 안겨줬다. 재해는 유사 이래 인류를 위협해 왔다. 해일현상은 자연의 법칙일 뿐이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래도 일본해일은 큰 충격을 줄만큼 그 규모가 컸다. 아니 우리가 경험한 가장 큰 해일이다. 이로 인하여 수만 명의 일본인이 희생되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족들의 한은 뼈에 사무친다. 아직도 일본의 재해는 진행형이지만 당시의 언론보도 내용을 놓고 일본 언론계는 뼈저린 반성에 휩싸여 있다. 우선 정부와 동경전력에서 발표하는 내용만을 가감 없이 발표한 것에 대한 뉘우침이 크다.

일본 언론은 지나치리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유족들의 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한국 같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울 터인데 일본인들의 냉정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우리는 당시의 보도사진을 보며 일본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흩트리지 않는 것인가 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니 너무나 드라이한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참으로 지독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일본인들도 내 자식을 잃고 이웃을 잃은 설움에 넋을 놓고 울었다. 다만 언론만이 자극성을 배제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통제했다. 한번 편집방향을 그런 식으로 정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정부가 하자는 데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후쿠시마에 방사능이 유출되었다고 해도 기자의 현장취재를 금했다. 행여 피폭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 회사의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종군기자가 일선에 나가지도 않고 후방 사령부에 앉아 전쟁기사를 쓰는 격이다.

실제로 후쿠시마 원전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지 치열한 취재경쟁이 벌어져야 할 일을 사무실에 앉아 죽은 기사를 썼던 것이다. 일본 언론계는 뒤늦게 수치를 느끼고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이는 지난 서울시장 보선을 두고 보여준 한국 언론에도 경고가 된다. 처음 안철수라는 사람이 서울시장에 나오겠다고 발표했을 때 언론이 보여준 태도는 한마디로 추태나 다름없다. 백면서생에 불과한 그를 마치 대정치가나 대행정가인양 대우한 것이다. 평소 기사 한 줄도 아끼는 언론으로서는 파격이었다.

안철수가 지니고 있는 저력은 의사직업을 버리고, 컴퓨터백신을 개발한 일이다.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카이스트에 스카웃되고 얼마 전에는 서울대 교수로 영입되었다. 오직 이것 하나만으로 그다지 언론이 떠들어야할 만한 일인가. 그것도 며칠 못가서 박원순에게 양보하고 물러났다. 서울시장을 하려는 의지와 소신도 밝혔던 사람이 금방 물러나는 것을 보면 치열한 신념의 인간상은 아니다. 컴퓨터백신을 개발한 창의적인 두뇌의 소유자임은 자타가 공인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신념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대선후보로 부각시키는 이유는 나변에 있는 것일까. 일본언론은 스스로 위축되었지만 한국언론은 남이 장에 가니까 따라가는 식이다. 스타를 만들고 영웅을 만드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기주의에만 영합하는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을 줘 심지(心志)를 세우고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언론이 이를 냉철하게 지켜볼 때 희망이 있다. 허장성세 부화뇌동하는 언론은 결국 사회의 암으로 변할 수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한국정치평론가협회 회장  전  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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