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쩌귀
돌쩌귀
  • 김규원
  • 승인 2023.11.1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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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백급종/수필가
백급종/수필가

깊어가는 가을, 고향을 찾았다. 문득 살 비비며 살았던 가족이 그립고, 단풍에 안긴 고향 집이 보고 싶어서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승용차가 마을 어귀에 닿았다. 단풍에 휩싸인 고향 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고적에 잠긴 듯 조용하다. 고샅을 휘젓고 다녔던 개구쟁이들도 볼 수 없고 인기척도 거의 없다.

긴 돌담을 돌아 우리 집 대문 앞에 섰다. 웬일인지 대문이 한쪽으로 비스듬하다. 옛날을 생각하며 밀어 보았다. ‘삐걱 삐꺽된소리만 낼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돌쩌귀 한 쌍이 먹물을 뿌린 듯 새까만 모습으로 딱 붙어있지 않은가?

우리 가족이 일가를 이루며 살 때는 이러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문을 밀면 스르르 잘 열렸다. 어른이나 아이나 가리지 않고 말을 잘 들어 주었다. 까만 밤을 지새운 대문이 오히려 반겼을지도 모른다. 동녘에 떠 오른 해가 대문 안으로 비춰 주면 밝아진 마당에는 신선한 공기가 그득했다.

대문이 열리면 소소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돌확에 보리를 갈아 아침밥을 지으시고 아버지는 모퉁이에 쌓아놓은 잡목 장작을 패셨다. 나는 대숲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에 귀를 모으고 강아지는 꼬리치며 쏜살같이 고샅으로 내달렸다.

대문에는 돌쩌귀가 있다. 문을 여닫는데 필요한 존재다. 암 돌쩌귀는 문설주에, 숫 돌쩌귀는 문짝에 달려 있다.

암 돌쩌귀에 안겨있는 숫 돌쩌귀가 스스럼없이 돌아가야 문이 잘 열리고 닫힐 수 있다. 한쪽 어느 것에 문제가 생겨도 문을 여닫는 데 어려움이 많다. 우리 대문은 숫 돌쩌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족이 하나둘 대처로 떠난 후 60여 년을 홀로 서 있었으니 어이 제 몸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주저앉은 대문에는 지난날의 잔영이 스쳤다. 아버지와 내가 대문을 만들던 모습이었다. 내가 문짝을 잡아주면 아버지는 먹물을 튕겨 마름하고 끌로 파내며 암 숫 돌쩌귀를 만드셨다. 비록 큰 기술은 없으나 마무리하고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렇게 만든 돌쩌귀가 훼손되다니…….

오랫동안 군대 생활을 하다 가정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현실에 어려움이 많았다. 직선적인 성격에다 군인정신이 몸에 밴 아버지는 유약하고 가녀린 어머니와 조화를 이루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몽돌처럼 서로 부딪치고 조율하며 그 간극(間隙)을 좁혀갔으리라. 아니 양보하고 맞추어가려는 어머니의 배려심이 한몫했지 싶다.

사랑의 돌탑이 하나둘 쌓여갈 무렵 어머니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군대에서 누적된 피로가 병의 원인이라 했다. 고단한 삶도 한몫했으려니 싶다. 어머니의 삶은 허접한 대문과 같이 불안정했다. 병간호에 신경 쓰랴, 많은 자식 보살피랴, 생활은 더욱 삐꺽거렸다. 항상 꽉 닫혀있는 대문처럼 답답했다.

어머니를 질곡의 수렁으로 빠뜨린 것은 아버지의 타계였다. 어둠의 터널에 갇힌 어머니는 신기루 같은 희망을 찾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논밭을 누볐다. 가족이라는 대문을 지키기 위해 가망 없는 일도 손발을 걷어붙였다. 그래서였을까? 손톱만큼 늘어나는 살림살이와 하루가 다르게 철들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고달픈 삶을 보상받았지 싶다.

돌쩌귀는 문을 여닫게 하는 것이 그 소임이다. 맑은 날 궂은날, 기쁜 날 슬픈 날 가리지 않고 가볍고 사뿐히 열리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별세하신 후 곤궁한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이라도 돌쩌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농사도 짓고 여섯 동생이 새 둥지로 찾아들 때까지 작은 힘을 보탰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한 적은 많지 않은듯싶다. 제 짝이 아닌 돌쩌귀가 구실 못하듯 가끔 소음이 나고 바람이 일었다.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나는 나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지쳐갔다. 그래도 세월이 가면서 어머니 얼굴에 웃음꽃이 시나브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뒤돌아보면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내 삶에 잊을 수 없는 보람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마주한 현실만 열어가려 했지 먼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돌쩌귀를 고치기로 했다. 썩어 내린 부분을 잘라내고 참나무토막으로 이어 달았다. 강력 풀로 붙이고 못질하여 고정하니 되살아난 형용이다. 물론 아버지가 만드신 것과 같이 튼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그런대로 스르르 잘 열리고 닫혔다. 균형을 맞추어 바르게 서 있는 모습도 듬직했다.

한 줄기 바람이 대문을 밀고 안으로 불어온다. 집안에는 햇살이 내리고 훈기가 돈다. 어린 시절 왁자지껄 떠들며 살았던 우리 가족의 서사가 마당에 펼쳐지듯 아련하다. 지금쯤 아버지 어머니도 하늘나라에서 당신이 만드셨던 대문처럼 어려움 없이 알뜰살뜰 살아가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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