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나와 함께 자라 숲이 된다”
“나무는 나와 함께 자라 숲이 된다”
  • 김규원
  • 승인 2023.09.04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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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31

 

시골집 측백나무 그늘에서

내 소년은

땅뺏기놀이로 영토를 넓혀갔지

한 뼘 땅바닥에 뿌린

푸른 꿈들이 씨앗이 되어

시들 수 없는 넓이로 숲을 써나갔지

내 청년은

측백나무 닮은 시가 되기로 했지

눈 뜨지 못해 거친 시들이

더 슬픈 숨을 깊이 쉴 수 있도록

계절의 출입문마다

빈손사상으로 손잡이를 달아주었지

내 장년은

늘 젊어 철없는 엽록소들이

청향을 발음하도록 은유로 날개를 달아주었지

그러자 어느새

측백나무는 푸르른 노래가 되어

내 노년은

그들을 동무하며 노닐며 거닐며

저물녘을 잘도 가고 있었지

 

-졸시측백나무 시절전문

측백나무는 어린 시절을 온통 휘감고 있는 나무의 대명사다. 우선 시골집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던 측백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집을 구성하는 빼놓을 수 없는 붙박이 요소였다. 나뭇잎이라고 하면 넓적한 면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런다는 듯이, 측백나무 잎은 묘한 나뭇잎이었다.

상록침엽교목으로 분류하지만, 상록이라는 점을 빼면 도무지 맞지 않는 듯하다. 침엽이라면 소나무나 전나무나 잣나무처럼 뾰족한 거부반응을 장착해야 하지만 측백나무는 매우 부드러운 이파리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그 열매를 따서 고무줄 새총에 넣고 탄환으로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나무가 시골집은 물론, 동네 모정 둘레에, 아니면 학교 울타리에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측백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또래 친구들은 땅바닥에 사금파리로 실금을 긋고 땅뺏기놀이며 제기차기며 자치기 등 성장의 시간을 풀어놓은 운동장이 되곤 하였다. 그래서 성장점마다 측백나무가 푸른 넋을 키우고 정신의 영토를 향기로 채우면서 넓혀갔을 것이다.

이런 측백나무에 일말의 희망을 덧씌운 것은 내 ‘문청’시절이었다. [시]문학에 빠져서 자취방을 덥힐 구공탄값으로 현대문학 월간지를 구해보며 문학청년의 꿈을 키워갔던 것도 생각해 보면 측백나무 그늘이 내 성장의 숲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엽이라고는 하지만 어루만지고 몸을 기대어도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무한 향기로 위로해 주던 상록의 정신을 흠향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측백나무의 촉감으로 펜을 잡고, 측백나무가 풍기는 청향이 영혼의 안자락에 일말의 위로가 되었던 시절이 바로 내 문청 시절이었다.

그리고 장년이 되었다. 아니 되어갔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땅에 뚝 떨어져 하나의 목숨을 부여받지만, 그것 역시 나무의 일생이 그러하듯 묘목이 곧 나무는 아니었다. 사람이 감당하면서 써나가야 할 ‘인생’이란 나무 역시 측백나무 묘목이 그런 것처럼 그냥 자라서 나무가 되고 숲이 되지는 않았다.

다 여물지 못한 측백나무에 쓰디쓴 폭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든지,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잠언들이 무시로 찾아와서 측백나무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는 격언을 몸으로 견뎌보라는 듯이 눈물의 계절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눈물 맛을 곱씹으며 인생 맛을 새겨두었음을 이어지는 삶이 증명하곤 하였다.

아픔으로 인한 상처, 슬픔으로 인한 심연의 우물이 깊어지면서 비로소 ‘빈손사상’의 손길을 가질 수 있었고, 철학과 사상이 먼 나라 손님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풍향계임을 알아 차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게 장년이 되어갈 수 있었다. 욕망의 건너편에 돌아올 수 없는 피안이 있으며, 청빈의 건너편에 무난한 차안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앎이 그저 정신의 사치가 되지 않기 위해 삶의 도처마다 ‘빈손사상’을 손잡이로 달아 둘 수 있었다. 아니 그런 불변의 자물쇠를 채우려고 했다.

그런 길은 어디 따로 있을까마는, 줄기차게 간직하고 시도하며 가꿔왔던 내 시문학의 영토가 그렇게 측백나무 향기로 채워가려는 시도를 시정신의 고갱이로 삼을 수 있었다. 측백나무가 언제나 청향을 발휘하듯이, 나의 못난 시들도 언제나 청향을 발음할 수 있도록 달래고, 나무라며, 때로는 윽박지르며 시의 숲을 이루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측백나무가 부르는 노래처럼, 나의 노래도 푸르른 악상을 닮아가고 있었으며, 청향의 선율을 담아내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시절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그렇다. 굳이 다른 데서 부여받은 목숨의 안식을 찾으려 할 것이 없다. 측백나무가 보여주는 부드러운 이파리의 침엽을 장착하고, 사시사철 그치지 않고 뿜어내는 청향의 뚝심을 흠향하면서 가던 길을 꾸준히 걸어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측백나무가 이루는 시의 숲에서 노닐며 거니노라니, 내 저물녘이 조금도 언짢을 것이 없다. 상처와 눈물의 자국마다 백향柏香이 고이듯, 그 푸르른 향기를 노래하면서 차안에서 피안으로 슬슬 나들이하게 될 것이다.

‘대구측백나무숲’이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지 올해로 61년이라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여 <도동측백나무숲100인시집>을 간행한다며 주최 측에서 시를 청탁해 왔다. 마땅히 대구만이 아니라,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의 숲을 이뤘던 청향의 세계를 측백나무에 담아서 축하의 말씀과 함께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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