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이울어 네 번째 주말을 맞았다. 봄 날씨 같지 않게 26℃까지 오른다는 예보에 남방셔츠 하나만 걸치고 카메라 가방을 둘러맸다. 오늘은 어디서 어떤 풀꽃을 만날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끌고 우선 아파트 단지 옆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올해는 봄비가 자주 내려 풀꽃들이 만발했다. 공원 산책로 조붓한 오솔길 양쪽으로 가녀린 꽃대를 바람에 하늘거리는 ‘꽃마리’가 한 뼘 넘게 자랐다. 파란 별처럼 녹색 풀숲을 밝히며 반짝이는 ‘큰개불알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클로버처럼 동그란 잎새 세 개가 앙증맞은 모양에 황금 나팔처럼 예쁜 괭이밥꽃이 널려있다. 5월에 피는 연보라색 쥐손이풀도 일찍 얼굴을 내밀었다. 별꽃, 개별꽃이 저마다 잘난 얼굴을 한껏 쳐들고 ‘날 좀 보아요, 예쁘죠?’하며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흔들며 애교를 떤다. 풀숲에는 뱀딸기가 어느새 빨간 몸을 만들어 부풀리느라 한창이다. 작고 노란 꽃이 한꺼번에 수없이 피어나는 뽀리뱅이도 언제 피었던지 작은 솜뭉치 씨앗을 만들어 보풀보풀 뭉쳐 날릴 준비를 마쳤다. 양점나도나물은 벌써 씨앗을 퍼뜨리고 꽃 밭침만 남았고 좁쌀냉이도 위쪽은 씨앗이 익어 떨어뜨리고 빈 껍데기만 쭈뼛거리고 있다.
봄 풀꽃들은 부지런하고 재빠르다. 짧은 봄에 피어서 얼른 씨앗을 내고 스러지면 그 밑에서 바로 다음 세대가 꽃을 피운다. 봄 내내 피는 듯 보이는 큰개불알꽃이나 별꽃, 꽃마리 등 봄꽃들은 금세 피어 씨앗을 내고 또 다른 가지에서, 또는 떨어진 씨앗이 다시 자라서 꽃을 피고 씨앗을 만든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기후 조건이 달라지면 스르르 땅속에 묻힌 씨앗으로 웅크려 내년을 기약한다. 농부들은 잡초라는 이름으로 몇 번이고 뽑아 없애려 하지만, 끈질긴 생명은 이듬해에 다시 살아나서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어 퍼뜨린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가다가 분홍빛 꽃잎이 지천으로 깔린 오솔길에 접어들었다. 자두꽃이 피었다가 지느라 분홍빛 꽃잎을 한없이 날리고 있었다. 자두꽃은 겹꽃이어서 꽃잎이 여러 겹을 이루기에 꽃이 질 때면 나무 아래에 이불 한 겹이 깔린 듯 수북해진다. 무릇 꽃이 다 그렇지만, 자두 꽃은 특별히 피어있을 때 곱고 예쁜 색을 자랑하지만, 시들어서 지는 꽃잎이 가엾어 보인다. 분홍에 자색을 섞은 듯 고운 물이 시들어 떨어질 즈음엔 색이 바래고 희미해져 볼품없어지기 때문일까?
꽃은 피어 꿀을 내며 벌레를 부를 때가 가장 예쁘고 향기도 진하다. 향기와 꿀로 벌레를 불러들여 수정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생존 본능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런데 올해는 벌을 보기 어렵고 나비는 거의 본 기억이 없다. 벌과 나비가 찾아와 꿀을 따며 화분(花粉)을 옮겨 주어야 수정되고 열매가 열릴 터인데 그 일을 할 곤충이 없다. 지구 온난화와 무분별한 살충제, 인간이 오염시킨 대기와 먼지 등이 곤충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어서라고 한다. 도시에 있는 공원이나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를 올려다보면 버찌를 거의 볼 수 없다. 어쩌다 한두 알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속이나 공기 좋은 숲속에 서 있는 벚나무에는 버찌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그나마 곤충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벌 나비 등 곤충이 살 수 없는 환경이 이어지다 보면 꽃도 피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다.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었는데 공연히 꽃 피우는 데 온 힘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상황에 이르면 우리 후대 사람들은 꽃이 없는 삭막한 세상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무섭고 부끄러운 일이다. 아름답고 고운 세상을 물려받아서 마구 오염시키고 버려놓아 후손들이 살기 어려운 황량한 세상을 물려주는 부끄러운 조상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지구는 이렇듯 오염되지 않아 맑고 깨끗했다. 전주천 한벽당 아래 돌무더기를 쌓아 드센 물굽이를 완만하게 했던 곳에서 아이들이 고추를 달랑거리며 멱 감고 헤엄치며 놀 수 있었다. 맑은 물에는 피라미, 마자, 갈겨니, 붕어, 메기가 아이들과 함께 헤엄치며 놀고 고기 병을 놓거나 낚시하면 금세 한 끼 반찬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아이들은 학원이니, 교습이니 생각하지 않으며 즐겁게 노는 건강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보다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한 환경에 사는 오늘을 다행스럽고 자랑으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동안 누린 맛과 즐거움과 편안함은 모두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누린 것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별로 만드는 엄청난 값을 치른 일이었다. 오늘만 살고 내일은 어떻게 되든 모른다는 지극한 이기주의에 나도 모르게 동참한 나날이었다.
오늘 내가 누린 이 꽃천지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 삶이다. 당장 내년에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 피지 않을 수 있고 아예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을 구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무한하게 반복될 거라고 믿었던 계절의 순환이 달라지고 있는 현장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지 않는가?
자연을 모르면서 마구 더럽힌 벌(罰)이 또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캄캄한 내일이지만, 우리는 오늘 전기 한 등을 끄고 웬만하면 자가용보다는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마음이 내년에도 꽃천지를 볼 수 있을 기대를 높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