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사벽’을 넘보는 즐거움”
“‘넘사벽’을 넘보는 즐거움”
  • 전주일보
  • 승인 2024.04.29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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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61

 

 

서녘시인을 만났다

를 찾는 일은, 꽃나무를 잊어버리는 일,*

바로 그 대목에서

서녘편지를 배달하는 집배원 종소리가 울렸다

봉함을 뜯기도 전에 구수한 들깨 냄새가

가난을 가득 채웠다

잠깐 ,

어떻게 파란냄새가 남루까지 들어갈가,

[~, 하지 않고 未堂을 따라, 가니]

,

무수한 무들이 넘사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너머에 너무도 많았다

해마다 잡곡상에서 딱 한 줌 얻어다

울타리 밑에 흩뿌려놓는다는, 서녘편지는

행간마다 돋아난 구수한 새싹들로 파랗다

,

이 한 줌이 이룰 파란 세상

그 안에 넘어 들어갈 수 있을가,

그 안에 를 심어 푸르게 가꿀 수 있을가

 

서녘에서 배달된 종소리가 들렸다

들깨씨앗을 심자 종소리가 울었다

 

*서정주의 시의 의미에서

*넘사벽: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줄임말.

 

졸시들깨씨앗을 심다전문

 

‘무無’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공기라든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압이라든지 소리의 파장[音波]이라든지 없는 것 같지만 실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무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듯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물리적인 것 말고 ‘영적靈的’인 것도 무에 가깝다. 우리가 과학의 발달로 앞에서 말한 공기-기압-음파 등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영적인 실재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영적인 바탕이 없는 인간 존재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영적인 것이 물리적인 몸[肉體]를 가진 인간의 근본이듯이, 무 역시 모든 있는 것[森羅萬象]의 근본일 것이다. 시가 추구하는 것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시는 보이고 들리는 것[現象]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보이고 들리지 않는 세계[근본-바탕-본질-원리…]를 있는 것들을 통해서 체험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1연에서는 그런 현실이 반영되었다. 들깨씨앗을 뿌렸다는 편지를 받자마자 구수한 들깨 냄새가 마음 가득, 뇌리腦裏에 가득차고 넘쳤다. 마침 미당未堂의 시 <무의 의미>를 읽고 있을 때였다. 설사 그런 기재가 없다 할지라도 생각[思惟]하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의심할 법했다.

“잠깐—”은 그런 발견과 각성의 순간에 방점을 찍는다. 그만큼 화자가 지니고 있는 생각의 발길을 붙잡아두기 위해 필요한 제스처요, 생각의 발단을 드러내는 시어로서 필요성을 지닌다. 이것은 화자만이 아니다. 독자에게도 그런 자극이 필요하다. “주목—,”이란 구체적인 언사와 유사한 행위다.

주목하고 보니 그렇다. 단순한 “서녘편지-서쪽으로부터 온 메시지-서방정토로부터 당도하는 어떤 각성의 의미”를 궁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어떻게 말 한 마디에서 화자의 마음 가득, 뇌리 깊숙이 “파랗고 구수한 들깨냄새가 진동할 수 있을까?” 미당은 “~심었는가, ~있는가?”처럼 의문문의 종결어미를 “~까”로 하지 않고 “~가”로 표기하기를 즐겨한다.

전라도 방언의 특징이지만, 질문마저도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경음[ㄲ]이 아니라 그보다는 부드러운 평음[ㄱ]으로 표기하고 발음하니 그만큼 사유의 문이 순하게 열리는 듯했다.

그래서 이 “~가”가 화자에게는 “~가可”로 변형되면서 “가능하다, 할 수 있다. can …의” 의미로 무수히 확장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구수한 들깨 냄새’가 뇌리에, 마음에 가득 찰 수 있다는 긍정이다. ‘넘사벽’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줄임말이다. 이 말은 능력이 탁월한 어떤 대상이나 인물이 있을 경우 그 대상(인물)과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니까 무수한 無들이 넘사벽의 그 아득한 시공을 넘어간 너머에 너무도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무들이 그렇게 많을까? 생각하는 대상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연, 시, 삶의 이편과 저편, 봄, 곡물의 씨앗 파종, 그것이 성장한 뒤 거두게 될 수확물의 쓰임새, 그리고 그런 손길이 지탱하고 있을 삶의 편린들, 이런 사연들을 통해서 멀고 아득한 시공이 이렇게 가까이 넘사벽을 하다니! 시적화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無-없는 듯이 보이지만 반드시 있을 수 있음을, 그런 발단을 확장해 본다. ‘해마다’가 반복되어 일생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나간 시간이나 닥쳐올 시간도 해마다에 불과한 인식일 뿐이다. ‘울타리 밑’은 삶의 가장 구체적인 시공이다.

진실은 멀지 않다. 바로 내 삶의 [시공상]근거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 현실을 ‘서녘편지’가 전달해 준다. 어디에 전달하고 심고 싹이 트는가? ‘삶의 행간마다’ 그렇다. 그런 삶의 구체적인 행간들이 ‘파란 냄새’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이, ‘행복한 삶’에 대한 형상이 아니겠는가.

다시 한 번 더 無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의 본질임을 재차 강조한다. 몸-육체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넘사벽할 수 있다. 그런 가능한 생각들이 화자의 영혼에서 고동친다. “종소리가 울리고-들깨씨앗을 심자”

이는 바로 내 몸의 구체성 또한 언제가 그리 멀지 않은 날엔 저렇게 “~넘어의 너머에 너무 많게 될가?” 그렇대서 종언은 언제나 슬픔일가? 깨달음의 즐거움 역시 눈물이다. 그것은 생각의 뿌리에 파랗게 돋아난 들깨처럼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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