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간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간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4.01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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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57

 

 

꽃이 봄에만 피는 건 아니다

늙은 나무에도 새는 날아든다

그런 날을 골라 세내三川 길에 나서본다

 

어디나 천국이어서 무릉도원을 알지 못하는

극락조는, 꽃비가 내릴지라도 우산을 챙겨 들지 않는다

 

사람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각하는 건 의욕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쇼크 때문이다*

 

강물 따라 펼쳐진 봄날극장 하늘스크린에

비극을 올리자, 꽃비 커튼이 오른다

이것은 결코 약하지 않은 쇼크다, 찰나다, 순간이다

 

사람은 좀처럼 꽃길에 서지 않는다

잠깐 반짝이는 봄,

날아가는 화살의 꽁무니를 따라갈 뿐이다

 

길동무의 발길에 차이는

극락조의 데커레이션만 남는 나날들, 의무감으로 사는 날들

비극에게 봄날을 더하자마자

앞길에 흩날리는 꽃잎, 꽃잎, 꽃잎 … …

 

극락조가 되기에 아주 쉬운 날

꽃비 오는 날, 세내길 흐르는 물길 위에

연분홍 새집을 차리고 본다,

일단 흐르고 본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에서

 

졸시봄날전문

내 시는 항상 나를 바라본다. 시선詩線이며, 심안心眼이다. 그래서 시인을 견자見者라 했을 것[랭보]이다. 직관은 언제나 심안으로부터 온다. 관찰과 관조를 헛갈려하는 독자에게, 육안과 심안의 차이를 그의 손에 쥐어줄 수 없으며, 직관이 왜 감각과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지 설명할 길이 옹색하다. ‘시간이 간다고 한다. 화살이나 쏜 화살을 개입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관찰하는 눈길로는 가는 시간의 화살을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심안으로 관조하니 가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바로 내가 간다.’ 물론 무딘 감각의 파장으로 잡은 것도 아니고, 재재바른 사유의 맥락에서 얻은 것도 아니다. 언뜻, 설핏, 잠시 스치고 지나간 찰나요 순간의 번개였다. 시간이 와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에 머물다 가는 것이 분명했다.

 

시는 나를 바라보는 좋은 도구다. 나의 고뇌는, 나의 고독은, 나의 행불행은 모두가 나로부터 비롯한다. 그런 나를 바로 볼 수 없다면, 바른 인생을 세울 수도 없을 것이며, 그런 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면 그래도 의 굴레가 어디쯤 굴러가고 있는지, 짐작이나마 할 수 있으리라. 그렇대서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망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시는, 나의 시는 그렇게 나를 직관한 결과다.

 

좋은 경치는 잦은 발길을 부르고, 맛난 음식은 많은 사람을 부른다. 좋은 책은 더 좋은 생각을 부르고, 즐거운 독서는 더 맛난 글을 부른다. 여기저기 명승지를 두루 돌아다녀본 사람만이 몸으로 읽는 독서=여행의 즐거움에 빠질 수 있으며, ‘가슴으로 하는 여행=독서의 즐거움에 빠져 본 사람만이 더 깊은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권위는 진실을 지운다. 권세의 위력이 무엇이 되었건 인간이 만든 권위는 자연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잠시도 그냥 두지 않고 늘 변하여 새롭게 이루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그냥 그대로 변하지 않아서 굳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는 기존의 변혁이자 부정이며, 모든 권위는 기존의 형식에 머물려는 타성의 산물일 뿐이다.

 

열대지방에 사는 극락조라는 새가 있다. 이 새들의 습성은 매우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신기하고 독특하다. 생김새-깃털의 색깔, 습성들이 아름답고 종들도 다양하다. 인간이 아무리 창의성을 발휘해서 꾸미고 연출한다 할지라도 극락조의 솜씨를 능가할 수 없다. 가히 신의 선물-신의 작품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답고 독특하다. 이 새들의 짝짓기는 아름답다-신비하다는 말 말고는 따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수컷이 암컷을 불러들이기 위해 자신이 거처하는 둥지-짝짓기를 할 장소를 정성을 다하여 장식한다. 극락조들마다 그 짝짓기 장소의 치장-데커레이션의 도구와 색깔과 중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인 것은 암컷의 마음에 차야 할 만큼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개성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극락조는 분홍 꽃들만 물어다가 짝짓기 장소를 치장하고, 어느 극락조는 짝짓기 장소의 청소에 정성을 기울이는가 하면, 어느 새는 검정 색깔이 있는 열매며 돌이며 소도구들을 모아놓기도 하는 등, 그 종류와 색채의 조화와 개성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이런 과정을 암컷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살펴보고 신통치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리거나, 심통을 부리며 야로를 친다. 심지어 애써 꾸민 신방을 부숴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면 수컷은 처음부터 다시 그 지난한 작업을 되풀이한다. 연민의 정이 느껴질 정도로 끈질기게 '신방꾸미기'를 되풀이한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자면 누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는지, 가소롭기까지 하다. 극락조들은 예술의 예자도 모르면서 [암컷이 느끼기에]아름답게-[암컷이]만족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신방꾸미기 작업을 되풀이한다.

 

봄날은 모든 유기체가 생명작업을 치열하게 하는 계절이다. ‘꽃이 피고 지는것은 사람 눈으로 보면 그냥 화개花開요 화락花落이겠지만, 생태계가 치열한 생명작업을 하는 순환의 과정일 뿐이다. 그 생명작업은 아주 짧고 단순하다. 그런 자연의 순환 속에 봄날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봄이면 되풀이되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감하는 화자의 미감에는 쇼크로 다가온다. 그런 봄날-늙은 나무도 꽃은 피우지 않던가? 그런 봄날이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과정[세내三川]을 목격하는 것은 생각에 게으른 화자에게도 일단은 생각에 머물게 한다. 의미 있는 쇼크로 오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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