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슬기와 사랑의 이중주다”
“삶은 슬기와 사랑의 이중주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3.1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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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55

 

 

시든 꽃을 피우겠다며

무학행자는 눈물을 뿌리는데

구름도 잡아 가두겠다며

암행어사는 새는 물동이를 찾는구나

 

사흘 굶어도 담을 안 넘은 여름은

가을 열매를 맺고

백날 입을 틀어 막힌 하늘도

겨울 지나자 봇물 터져

기쁨으로 천지에 꽃보라를 피운다면

 

피 흘려 겨울을 지우는 일이나

눈물 흘려 봄을 피우는 일이나

무엇으로, 우리 더불어 가는 이 길이

나뉠 수 있겠는가

 

졸시뜨거운 얼음전문

우리가 자주 입에 올려 쓰는 말에 차례를 매긴다면 사랑이란 낱말도 메달감은 될 것이다. 희망, 평화, 하늘, , 눈보라, 오솔길, 우정, , 어머니, 아기, 그리움 등 명사만을 놓고 보아도 어느 말에 금메달을 주어도 듣기 좋은 말들이다. 여기에 동사나 형용사 등을 순위에 넣는다면 순위 매기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사랑이란 말 때문에 이런 상상을 해봤다. 이 말은 우리가 즐겨 자주 입에 올리는 순위를 매긴다면 아마도 금메달감이 틀림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부부 사이에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으면 이혼 사유가 된다는 판례가 있음을 해외 토픽으로 접하면서, 참 별난 나라의 별난 풍습이라며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어느 사이 우리 사회에서도 사랑한다!”는 입말이 서양 못지않게 널리 쓰이게 되었으며, 그들 못지않게 사랑 고백이 부부 금술의 척도가 되어 있는 형편이다.

 

입말이어서 사랑해요!”란 고백을 쉽게 하는지 모르지만, 이 말처럼 무거운 말이 따로 없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사랑의 필수요소로 보았다. 사랑하는 이의 생명과 성장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고, 사랑한다면 그의 부름과 요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또 하나의 나라고 여겨 존경하며, 사랑한다면 주변에 머물지 말고 사랑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롬의 지적이 아니어도 사랑이 명사의 추상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터득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를 이해하고, 그를 존중해야 한다. 또한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하며, 사랑하는 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랑의 추상성이 하늘에서 내려와 땀과 눈물을 양식으로 하는 지상의 일상이 될 것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사랑의 실천성이 손에 잡힌다. 사랑하는 이를 이해understand하는 것은 상대의 아래에 서는 것[under+stand]이다. 그러자면 상대를 존경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군림하고 명령하는 위치에서는 이룰 수 없다. 또한 사랑하는 이의 요구에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헌신할 수 있다. 그리고 인격은 책임지는 능력(I.Kant)이라고 했듯이, 사랑하는 이를 삶의 종착역까지 보호하고 보살피는 행위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바로 인격의 반영임을 실감한다.

 

근대에 들어 사랑이란 말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는 사랑이 쓰일 자리에 자비慈悲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이 불가에서 유래된 것을 생각하면 그 의미망은 매우 큰 폭을 지니고 있다.

 

는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고대인도 산스크리트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에는 자비[karuna], 자애[maitri], 기쁨[murita], 평정심[upeksha]"이 함축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는 는 사람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는 곧 여락與樂-즐거움을 줌이라고 풀이한다.

 

이와 달리 -karuna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다, 고통을 없애 준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동정이나 연민의 정서가 이 에 들어 있는 셈이다. 불가에서는 비를 발고拔苦라고 해서 고통을 뽑아 없앰의 뜻으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자비는 곧 발고여락拔苦與樂=중생이 지니고 있는 고통을 뽑아 없앰으로서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기의 개념과 실천적 행위라는 구체성에서 자비로움이 지니고 있는 의미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쉽게 하는 만큼 사랑의 구체성이 메말라 가는 현실이나, 자비로움을 염불처럼 외우면서도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비와 사랑의 참뜻을 제대로 각인하지 못한 데서도 유발하지만, 그보다는 앎보다 감이 앞서기 때문이 아닌가, 즉 감성적 맹목성이 이성적 혜안을 가리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말하자면 사랑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야 할 지식의 결핍이 바로 이성의 혼란을 불러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지식이나 이성은 흔히 얼음처럼 차가워야 한다고 주문한다. 지식이나 이성에는 감성적 열성과는 다른 길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비[사랑]은 뜨거워야 한다. 이것은 감정의 발동이요 감성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손으로 내미는 사랑고백을 맞잡아 줄 손은 없다. 뜨거워야 한다. 사랑의 감정은 용광로처럼 뜨거워야 하고,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어둠을 불사를 수 있는 열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속성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이성적 측면을 외면하게 되고, 허울로 남겨진 사랑의 상처 때문에 신음한다.

 

이것은 지혜가 없는 사랑[자비]로 맹목盲目에 빠지고, 자비[사랑]이 없는 지혜로 메마른 관념觀念에 흐르기 때문이다.”[법구경] 그래서 지혜는 얼음처럼 차가워야 하고, 사랑은 용광로처럼 뜨거워야 한다. 그러므로 뜨거운[사랑] 얼음[지혜]’로 무의미한 맹목적 사랑의 함정과 무미건조한 관념의 장난에 빠지지 않아야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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