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밭
묵정밭
  • 전주일보
  • 승인 2022.07.0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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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시인
정성수 시인

한 동안 아버지가 절박하게 매달려 농사짓던 당산 너머 황토밭
참깨 꽃이 하얀 달밤에는 
봉평에서 대화까지 열렸던 메밀꽃 핀 밤길이 열리고 
농사꾼인 아버지와 그 뒤를 따라가는 어머니가 도란도란 흔드는 
나귀들의 망울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단한 육신을 치매병원에 맡긴 채 말이 없고 
어머니는 천년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하여 
밭은 버려졌음으로 묵정밭이다
그 밭에는 망초가 애기똥풀을 업고 왼종일 서성이고 밤이 오면 
풀들이 무성히 눕는다
묵정밭 어둔 하늘에는 별들만 총총하다

 

묵정밭은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두어 거칠어진 밭이다. 그래도 봄이 오면 묵정밭은 봄나물의 향연장이 된다. 혹독한 눈보라를 이겨낸 봄나물은 따뜻한 봄볕과 신선한 공기를 맞으며 누가 더 향이 강한지 뽐내고 있다.

밭 귀퉁이에서 자라는 달래와 부추는 서로 힘이 세다며 줄기를 하늘로 쭉쭉 뻗어 올리고, 냉이와 쑥은 서로 봄을 대표하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늘진 곳에 자리 잡은 머위는 식욕을 돋우는 데 최고라고 엄지를 세운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땅두릅은 고기보다 맛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할 말이 없는 잡초들은 눈만 말똥거리고 있다. 보살피는 사람이 없는 묵정밭이 그리운 것은 뒷산에서 야밤에 우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신 선조들의 옛이야기와 손이 닿지 않아 못 긁은 등처럼 어린 시절이 가렵기 때문이다.

묵정밭 가꾸기에 성공한 사람은 포기한 것을 살려낸 동시에 죽은 목숨을 거둔 것이다. 길을 내고, 길을 닦으면서 앞서간 사람들은 지금도 그 길을 외롭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 마음속에 다시 묵정밭이 되지 않도록 갈무리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이다.

묵정밭 앞에 서면 노년의 만추가경晩秋佳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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