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아닌 ‘공존 시대’를 열어야
경쟁 아닌 ‘공존 시대’를 열어야
  • 전주일보
  • 승인 2021.06.2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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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편집고문
김 규 원/편집고문

세상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 기술 혁신에 따른 일상생활 변화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인식의 변화가 거세다. 묵은 사고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현상이 곳곳에서 새롭게 드러나고 기성세대의 화석(化石) 사고에 반발이 거세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지나면서 자연과 멀어지고 홍수처럼 쏟아지는 미디어를 더 많이 접하는 동안 저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답답한 현실을 타개할 무엇에 목말라한다. 이런 현상에 일찍 눈을 떠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준석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묵은 사고에 갇혀 헛소리를 반복하는 정치판은 여전히 일장춘몽의 여흥(餘興)이 덜 깬 모습이다.

민주당은 어쩌다가 감격스럽게 거대 여당이라는 주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꿈에서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선에서 참패하고도 사랑이 넘쳐 꾸짖은 정도려니하고 믿으며 주인의 본심은 여전히 민주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저마다 대통령을 해보겠다고 우르르 나섰다. 후발주자들은 현재 우세한 후보를 헐뜯고 깎아내리느라 여념이 없다. 유력한 후보를 깎아내리면 자신이 올라선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경쟁으로 대권을 쥘 수는 없다. 외려 반대 당을 돕는 일일 뿐이다.

후발주자들이 당헌을 바꿔서라도 경선 일자를 늦추려 했지만, 예정대로 95일 후보자를 확정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65일 동안 경선 일정을 활용하여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 지지를 끌어 올리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아직도 묵어 터진 사고에 매여 허둥지둥하는 자세로 정권을 다시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경쟁사회가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선의의 경쟁은 오늘의 사회를 이루는 촉진제가 되었고 능력을 가늠하는 수단으로 더 나은 리더를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승자독식의 구조를 불러와 문화와 역사가 왜곡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오로지 1위에만 집중하면서 사회 구성원 간 격차가 심화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이 고착되었다.

승자의 밥그릇은 대물림되어 왕대밭에서만 왕대가 나오는사회로 고착하는 중이다. 많은 돈을 들여 과외와 과외를 거듭해야 좋은 학교에 갈 수 있고 좋은 학교에서 좋은 공부를 한 학생이 좋은 일자리를 차지한다.

지난날 몇 과목만 열심히 하면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어서 가끔 개천에서도 이 나왔지만, 오늘날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헛소리다. 학업성적으로 따지지 않는 스포츠 분야도 막대한 뒷바라지가 있어야 좋은 코치에게 배울 수 있고 국가대표에도 들어가 상당한 위치에 오를 수 있다. 예술 분야도 역시 돈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최근에 이준석 신드롬으로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그도 뒷받침이 없었다면 KIST를 거쳐 하버드에서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에 대변인을 선발하는 방법으로 또 한 번 국민의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쉴 새 없는 질문을 통한 압박 면접으로 16명을 고르고 44 토론배틀을 통해 8, 다시 토론배틀로 4강을 가려 2명은 대변인에, 2명은 상근 부대변인으로 임명하는데 임기는 단 6개월이라고 한다.

6개월짜리 대변인이라면 당의 내부와 정책, 흐름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시간인데 이런 과연 그들이 얼마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저 이 대표의 생각에 따라 말을 대신하는 문자 그대로 대변인이 아닐까는 생각도 든다.

이 대표는 선출직에 나가는 사람도 일정 수준의 실력 검증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모든 일을 경쟁으로 풀어내려는 그의 생각은 신선한 듯하지만,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학교에서 제일이듯 사회도 스펙이 좋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논리다.

계급이 높은 애송이 장교에게 아버지뻘 준사관이 야단맞는 군대조직이 떠오르고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력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는 박정희 군사쿠데타 시절 국민교육헌장이 머리를 스친다. 발전과 진화과정에서 경쟁이 필요했고 일부 분야에서는 경쟁이 불가피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경쟁을 앞세워 계층을 나누려는 생각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합리적 변화, 자연스러운 공존

 

정치판은 변해야 하지만, ‘너 죽고 나 살자식의 경쟁으로 우수한 자가 경쟁에서 진 자들을 이끌어가는 세상이어서는 안 된다. 오직 경쟁으로 서열을 정하는 동물의 세계가 아닌 바에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점수로 신분을 정할 수는 없다.

그런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계단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상층과 하층을 분리하는 데 동조하는 사회 풍조로 흐르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신선해 보인다는 점에서 일시적으로 시선을 모으는 정도이기 바란다.

내년 대선과 함께 치러질 지방선거에 뜻을 둔 사람들의 물밑 활동이 감지되지만, 지극히 미약하다. 드러내서 활동할 수 없는 악법에 묶여 어렵게 뜻을 전하고 있을 뿐, 운신의 폭이 너무 좁다. 법이 현직에 유리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현직은 마음대로 주민을 만나 좋은 점을 보여주고 매체를 통해 선전까지 할 수 있으니 대항할 길이 없다. 지나치게 기울어진 선거법이다.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를 관리하기 쉽게 하느라 공천제를 만들고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지금 변해야 할 곳은 바로 국회이고 정부와 검찰 사법이다. 나라의 세 중추가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으니 변할 수 없다. 기득권층끼리 잘 먹고 잘사는 나라, 아무리 권해도 쇠귀에 경 읽기로 주인인 국민을 우습게 아는 그들이다.

이준석 대표가 새바람을 불러오는 듯하지만, 그의 경쟁방식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고착하자는 뜻에 다름아니다. 경쟁력 없는 사람과 계층이 도태되어 아랫것으로 사는 아픈 시대에 화룡점정으로 경쟁 시대를 완성하자는 뜻이 아니라면 이런 장난은 그만두어야 한다. 가만두어도 경쟁은 이어지고 있다. 패자를 감싸 안는 자연스러운 공존시대를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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