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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할 수 없는 사진금요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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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6  17: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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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수필가

가을이 깊은 11월 어느 주말,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삼천변 자전거길을 타고 전주천 길로 들어가다가 억새꽃이 만발한 천변길의 정취가 물릴 무렵에 도로 위로 올라갔다. 억새 천지인 길처럼 편하지는 않지만, 황금의 비가 내려 온통 금빛인 은행잎 덮인 거리가 그리웠다.

은행잎이 내릴 때 보면 일반 활엽수 잎처럼 한들거리거나, 팔랑거리지 않고 그냥 휘리리 휘리릭 맴을 돌며 조금 빠르게 내린다. 잎자루가 아래를 행하고 조금 빠르게 맴을 돌며 내리면 구르지도 않고 차곡차곡 쌓인다. 노란 잎이 도로 위를 가득 덮어 내릴 즈음이면 이미 가을은 떠나기 시작하고 뒤를 따라 겨울 서릿발이 은행잎 갈피 사이로 돋는다.

그 초겨울의 노란 길에선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야 한다. 조금은 푹신하고 미끄러운 듯한 은행잎 카펫 위를 걸으면 공연히 행복해지고 마음은 넉넉해진다. 은행잎이 다른 잎보다 두껍고 바람에 휘날리지 않아서 그 자리에 쌓여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 노란색이 주는 안온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노란 은행잎이 앙상한 가지만 두고 가을바람에 맴돌며 비처럼 떨어져 내릴 때면 어디선가 낮고 느린 G 선의 바이올린 소리가 짙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가을의 축복처럼 하늘과 땅에 가득하던 잎이 모두 바닥에 내려오는 끝자락의 안타까움에서 들리는 환청인지도 모른다. 노란 카펫 위를 걷다가 내 머리 위로, 어깨나 얼굴을 스치며 떨어지는 은행잎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안다. 들린다. 그 낮은 음색의 바이올린 소리가.

다른 낙엽은 팔랑팔랑 이리저리 흔들며 떨어져 바람이 흔드는 대로 굴러다니지만, 은행잎은 웬만한 바람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도로에 쌓인 은행잎은 청소원들이 쓸어가지 않으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쉽게 썩지도 않는다. 나무에 붙어있을 때도 은행잎에는 벌레가 붙지 않아 떨어져 내릴 때까지 성한 모습을 유지한다.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 뚫린 활엽수하고는 다른 품위를 가진 게 은행잎이다.

가을은 노란 은행잎이 가득 깔려 아늑한 노란 길로 변할 때 비로소 가을답다. 그 충만한 노랑과 아득한 그리움을 발아래 두고 걸을라치면 세상은 안온하고 평화롭다. 그 평화와 안온함을 느끼기도 잠시, 낮은 음색의 G선 선율이 파고들라치면 내 가슴은 음압(音壓)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활엽수의 낙엽이 수선스럽게 버스럭거리는 것과 달리 조용하고 포근한 그 발걸음 소리를 흩트리는 선율.

그 슬픔과 상실의 소리는 어쩌면 내가 청각장애를 갖고 있기에 이명처럼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계절에 은행잎이 뒤덮은 거리를 혼자 걸어본 사람이라면 청각장애가 없어도 그 낮고 느린 슬픈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노란 잎이 하나, 둘 자꾸만 떨어져 내리고 오래지 않아 얼마 남지 않은 잎을 모두 벗어야 하는 그 가을 길에서라면 그 소리가 당연히 들렸어야 한다.

언젠가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하고 안타까운 사람과 함께 걸었던 길이라면 그 낮은 소리가 더 아프게 들렸을 터이고, 그 소리를 따라 “또깍, 또깍, 또깍”하는 구두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구두 소리와 함께 낙엽의 냄새보다 더 아련하고 그리운 체취가 코끝을 맴돌아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냄새를 맡아보았어야 한다.

 

벌써 50년도 더 지난 어느 가을날, 우연히 친구 집에 갔다가 갈래머리를 한 어떤 여학생을 보았다. 오동통한 얼굴에 부끄러움으로 가득하던 얼굴, 찌푸린듯한 눈매가 사정없이 날 흔들었던 그 앞에서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떨어진 은행잎만 발로 툭툭 차다가 그 아이가 간 뒤에야 아쉬워 애를 태웠다. 가을 내내, 봄 내내 가슴을 태우며 먼발치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갑작스런 집안 형편으로 억지로 잊어야 했다.

그 후에 가을이 올 때마다 은행잎을 보면 그 아이를 생각했고, 그 눈매는 가을과 함께 날 찾아왔다가 슬그머니 숨어버리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아내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배우고 아내와 함께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또각 또각’ 구두 소리에서 지난 세월을 조금씩 지워가며 가을의 의미를 새롭게 알아갔다. 그런데 그렇게 내 가슴을 달래주던 아내가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얻어 오래도록 날 간병인으로 살게 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가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던 때에 아내조차 나를 두고 떠났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내게 가을은 퍽 소중하고 고마운 계절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 수 있어서 매년 잎들이 물들기 시작하면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만든다. 그런데 여태 은행잎이 가득히 널린 노란 은행잎 길은 단 한 장도 촬영하지 못했다. 내 눈에 보이는 그 길엔 슬픔뿐이어서 렌즈에 담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앵글을 맞추어 보았지만,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해마다 올해는 꼭 그 슬픔 덩어리를 사진으로 남겨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그 노란 길에 들어설 때는 카메라를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가슴에 짓쳐들어오는 무겁고 아픈 그리움과 아픔이 날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카메라를 둘러메고 자전거로 은행잎이 깔린 길을 찾아갔지만, 그 노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여 시간을 다 허비하고 말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노란 슬픔을 사진으로 담아낼 자신이 없어서 앵글을 맞추지 못했다고 해야 옳다. 내 마음에 닿은 슬픔의 깊이와 앵글의 깊이가 너무 큰 차이를 보여 사진을 만들 수 없었다. 아직도 나는 오래된 슬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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