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귤
제주 감귤
  • 전주일보
  • 승인 2018.11.1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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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맘 때면 일반 시중에서는 제주 감귤이 시판돼 봇물을 이룬다. 지금이야 흔하지만 제주 감귤은 본래 임금에게 진상됐을 정도로 귀하디 귀한 과일이었다.

감귤에 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고려 문종 때(1052년)다. 당시 문헌에는 감귤과 관련, '탐라국의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해 감귤이 그 이전부터 진상품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제주도의 대표 진상품 중 하나로 손꼽혔다. 감귤 과원은 특별 관리대상이었다. 제주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은 감귤이 얼마 열리지 않았는데도 나무에 달린 숫자를 파악할 정도로 감귤 수확량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특히 제주 감귤의 진헌을 위해 1526년(중중 21) 제주목사 이수동은 5개의 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했고, 이후 1530년(중종 25)에는 과원을 30개소로 늘렸다.

임금은 진상된 감귤을 성균관과 사학 유학생들에게 나눠 주며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장려했다. 또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를 실시해 경축했다. 조선조 후기 과거 시험이 많아져 급제자가 증가해 폐단이 생겼을 때도 다른 과거 시험들은 줄었지만 황감제 만큼은 계속 시행했을 만큼 감귤 진상은 의미가 컸다.

숙종 때는 담금귤 종사를 제주에 보냈는데, 그 뒤 귤나무가 열매를 맺어 목사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면 임금은 선원전에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영조실록(영조 51년)에도 "제주에서 감귤을 바쳤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해 창덕궁에 나아가 천신례를 행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 감귤은 조선의 풍속화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기녀들이 과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풍악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과 헌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자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귤림상가'등이 대표적이다.

감귤이 귀한 음식이다 보니 진상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않게 나타났다. 천신이나 진상으로 바쳐지는 공식적인 용도 이외에 제주 목사를 비롯해 관리들이 사사로이 감귤을 확보해 중앙 재력가에게 바치는 뇌물로 쓰이거나 사적인 용도로 징수하는 폐단을 낳았다. 제주 감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청와대가 제주 감귤 200톤을 북한에 보냈다.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북측이 보낸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이자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귤을 맛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한켠에서는 "북한에 조공을 보낸 것이 아니냐"는 저급한 비난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 감귤이 지난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이후 민간 교류의 대표적인 품목이었던 사실을 보면 중단됐던 남북 교류의 가교 역할을 다시금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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