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虛無는 곱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허무虛無는 곱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3.04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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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53

 

 

오늘은

가벼운 유리생각을 밥상에서 들어 올리려다,

 

어제는

두툼한 낱말사전머리를 책꽂이에서 빼내려다,

 

아마도

날카로움이나 무거움에 다친 아픔 아닌 채

 

내일은

나까지도 빛줄기 따라 내려앉게 될 것이다.

 

졸시떨어뜨리다전문

반세기 가까이 형제처럼 지내는 십여 년 후배와 산길을 걷는다. 마땅한 화제가 없었던지 나에게 묻는다. 형님, 요즈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지요? 생각해 보면 나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 나와 산책길을 동행해 주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점심도 함께 나눌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일이 고마웠다. 후배도 정년한 지 10년이 되어가니, 나는 벌써 그보다 두 배 긴 시간 정년 후의 여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선배의 노년풍경이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내 근황을 들려줬다.

 

근황이라야 별거 있겠는가. 새로운 일을 만들지는 않으나 될 수 있으면 기왕 하던 일은 지속하려 하고, 될 수 있으면 건강정보가 주는 귀띔을 외면하지 않으려 하며, 될 수 있으면 기왕의 버릇을 크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그러니 평생 해오던 글읽기와 글쓰기를 버릇처럼 지속하고 있다는 것. 문명의 이기가 주는 사소한 혜택을 거부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한 누리려 한다는 것, 할 수 있는 한 몸을 부리고 움직이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 한다는 것, 그런 정도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후배가 그런다. 그렇게만 살면 형님은 2백 살도 살겠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하는 후회가 내 머리를 때렸다. 후배의 반응은 아마도 필자의 근황이 오래 살려고, 혹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꼴로 비칠 수도 있었겠구나,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망정 생에 대한 노탐老貪으로 비칠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뒤늦은 각성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년의 삶이 벌써 2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으니, 필자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최근에80세의 벽<와다 히데끼. 한스미디어. 2022>이라는 책의 내용이 인터넷망을 통해 유튜브 짤 영상으로 자주 소개된다. 이런 정보를 일부러 찾지는 않지만, 가만히 있어도 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관련 정보들이 휴대전화기에 답지하고 있으니,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형편이다. 설사 열어 본다 할지라도 내 처지와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을 골라낼 수 있는 안목을 늘 유지하자고 다짐하는 터수라, 어떤 정보든지 무조건 맹신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 책의 내용이 필자가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생활습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80세 이후에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신체 기능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건강검진을 일부러 사서 받을 것도 없고, 설사 암 진단 등 험한 결과라도 수술 등을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소 내 견해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또 있다. 80세까지 해오던 일이라면 굳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그만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술과 담배도 80세까지 즐겼다면, 노령을 걱정해서 담배를 끊거나 술을 절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술과 담배가 건강에 유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나이까지 즐겼다면 그 이후로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승용차 운전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 발생 건수를 예로 들면서 24세 이전의 젊은이들과 80세 이후의 노년층이 내는 사고의 빈도를 조사하면 젊은이들이 내는 사고가 훨씬 많음에도, 노인이 교통사고를 내면 대서특필하여 노인들의 운전을 제한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떤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80세 이후에도 운전대를 손에서 놓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불편한데 병원을 외면할 수도 없겠지만, 병의원 순례하듯이, 의사 쇼핑하듯이, 각종 약을 보약 챙겨 먹듯이, 하지는 않는 형편이니 그래도 다행이라며 지낸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따금 전에 하지 않던 실수를 더러 한다. 엊그제는 무거운 대형 국어사전을 책꽂이에서 빼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왜 이러지? 오늘은 식탁에서 가벼운 유리잔을 들어 옮기려다가 깨뜨리고 말았다. 내가 왜 이러지? 하지 않아도 좋을 실수를 하고 나니 조금 민망해진다. 나름대로 체력에 맞는 근육 중량 운동도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걷기운동도 하는 편인데,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자문의 기회는 날마다 늘어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외부에서 받는 크고 작은 아픔, 경쟁 사회를 견디느라 무거워진 인생이 입은 날카로운 상처 때문에 내 몸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빛이 보내는 에너지를 무시로 받으면서 생육해왔듯이, 그 빛줄기가 보내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두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를 향하고 있음을 수시로 자각하는 삶,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각할 수 있는 여유도 지속해온 독서 덕분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세계관 앞에 서면 빛줄기를 따라 자신을 허공의 집-허무의 늪에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굳이 종교 발상이라서가 아니다. 내 인식의 촉수를 조금만 내려놓고 견줘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어서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은 불변하거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생각, 감정은 물론 신체 상태 등도 변하고 흘러갈 뿐이다.

 

이러니 세상의 법칙, 원리, 현상 등이 수시로 흘러가며 변화해 가는데, 어디에 나[自我]를 묶어둘 수 있겠는가? 변하고 흘러가는 것들 중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 없는 나[無我]를 설정해 둔 채, 불멸의 생을 고집할 이유나 필요가 없을 뿐이다.

 

이렇게 자각할 수 있는 본성이 곧 자성自性임을 안 것도 독서 낙수 효과다. 자성은 곧 불성佛性에 닿고, 불성은 또한 법성法性이며 공성空性이다. 그러니 결국은 [태어나기 전엔]있지도 않았고, [소멸하고 나선]없지도 않았던, 허무虛無만 남는다. 이런 생각을 곱씹을수록 무아無我의 단맛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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