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생각과 느낌이 전부인 ‘나’를 직시하는 것”
“깨달음, 생각과 느낌이 전부인 ‘나’를 직시하는 것”
  • 김규원
  • 승인 2023.10.23 14: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상수상詩想隨想 -36

 

 

나를 비운 가장 낮은 처소에서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나를 놀라게 하다

 

진공에서 묘유하듯, 지상에 앉은 날개를 만나다

 

나무에서 나무로 길을 내는

저 날개에, 무슨 고장이 생긴 것일까?

 

두 발로 깡충거리며 뜀박질하는 새

아니, 지상의 날개

 

날개 다친 새들이 뛰어다니듯이

날개 없는 새들도 밤낮 날아다닌다

 

남의 나라까지 밥벌이 길을 낸

딸들도 아들들도, 밤낮 없이

없는 날개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날아다닌다,

뛰어다닌다[생산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가]

 

하늘을 나는 새들도

비행구름 무성한 놀이동산보다는

하늘 징검다리를 이 나무 저 나무 뛰어다닐 것이다

 

새들도 하늘에서 보니 지상의 무리

다친 날개나 고단한 뜀박질이나

없는 생각을 낳아 있는 날개를 다칠 뿐이다

 

-졸시지상의 뜀박질전문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생각의 잔뿌리로 뻗어간다. 새벽에 분리 배출 쓰레기장 주변을 청소하려니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 했던지, 직박구리 새 한 마리가 깡충~ 푸드득거리며 달아난다. 나무에서 나무로 잽싸게 활강하는 저 새가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외양은 멀쩡한데 아마도 날개를 다쳤음에 틀림없으리라. 날개 없는 존재들은 천생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뜀박질은 그러므로 생존의 필수 요소다. 삶의 치열함을 아무리 고상하게 분식한다 할지라도 먹이활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삶이 고상한 척하는 사이에 정작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존재의 엄숙성은 사라져 버리고 하찮은 물질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던가! 인간이…

화자는 때마침 비행기를 타고 외국 나들이를 다녀온 직후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상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한 느낌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이었다. 시속 수백 킬로미터 속도로 날아가는 날틀 안에서 지상을 바라보면 무슨 새라도 된 듯 우쭐해지기도 하겠지만, 지상에 눌러 붙은 키 작은 모습들이 하찮게 보인다. 아무리 하늘 닿은 바벨탑을 쌓을지라도 결국은 하늘 아래 뫼일 뿐,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자유의 상징인 새마저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살기 위해 뜀박질에 여념이 없는 기껏 하찮은 미물일 뿐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뭐 다를 것 있으랴. 다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빌미를 날개 다친 새에서 얻은 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라 여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생각의 날개를 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신비한 특징이 아닌가, 생각하려니 곧 진공묘유가 걸린다. ‘일어나는 생각’이라 했지만, 그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아무리 궁리해도 생각 역시 뜬 구름일 뿐,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그 생각의 뜬 구름을 붙잡지 말고 현재의 자신을 직시하라고 했던가 보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지만 그 생각의 뿌리 역시 공-없을[無] 뿐이다. 있는 건 지금 이 순간뿐!

날개는 비상하는 원동력이고 자유의 상징이다. 인간은 날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 뛰어다닐 수 있는 두 다리를 가졌다.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이나, 인간이 지상을 뜀박질하는 것이나 ‘생존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개 없음을 한탄하는 인간의 생각 역시 없는 것[空-無]에서 있는 것[有-在]을 찾는 무망한 일이 아닌가. 그 생각의 뿌리는 결국 인간의 인간에 대한 연민이거나 미련과 멀지 않다.

날개 다친 새가 먹이활동을 위해 쓰레기장 주변을 맴돌다가 사람 기척에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살아 있는 존재의 하찮음과 함께 살아 있음의 엄숙성을 동시에 느끼는 묘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날 수 없는 새일지라도 살아 있음[有]만이 진리라는 듯이 맹렬했다. 하물며 그 살아 있는 존재의 최고봉에 섰다고 으스대는 인간됨됨이에 생각이 미치자 생각의 뜬 구름이 허망하기만 했다.

어디에 삶의 중심과 무게를 두어야 할까? 아니 이 존재의 허망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결국은 치열함 생존의 몸부림-날갯짓이나 뜀박질이나 허망한 삶의 한계를 보일 뿐인가. 그래서 “없는 생각[無]를 낳아, 있는 날개[有]를 다칠 뿐이다”라고 결구했다. 생각의 근거는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생각’인 듯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미련이요 미망이며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없는 생각-미련, 미망, 욕망으로 있는 날개-존재의 구체성, 유기체적 특성마저 다치게 하는 것이 인간은 아닌지……

삶[존재]가 의미 없다는 것도, 허무감에 패배한 자의 넋두리도 아니다. 다만 인생이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는 것[깨달음]이 곧 해답에 이르는 길임을 짐작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어쩌자는 것도 아니다. 시적 정서를 통해서 ‘지금-여기’를 바투 그려내는 것 역시 영혼을 풍요롭게 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영혼’이라 했지만 그 실체는 곧 ‘생각과 느낌’이 전부다.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는 곧 ‘나’의 됨됨이다. 생각하는 힘과 느낌의 깊이와 넓이가 곧 나를 이룬다. 그렇게 이루어진 ‘나’의 성장[변화]만이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생각의 잔뿌리로 뻗어간다. 새벽에 분리 배출 쓰레기장 주변을 청소하려니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 했던지, 직박구리 새 한 마리가 깡충~ 푸드득거리며 달아난다. 나무에서 나무로 잽싸게 활강하는 저 새가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외양은 멀쩡한데 아마도 날개를 다쳤음에 틀림없으리라. 날개 없는 존재들은 천생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뜀박질은 그러므로 생존의 필수 요소다. 삶의 치열함을 아무리 고상하게 분식한다 할지라도 먹이활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삶이 고상한 척하는 사이에 정작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존재의 엄숙성은 사라져 버리고 하찮은 물질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던가! 인간이

화자는 때마침 비행기를 타고 외국 나들이를 다녀온 직후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상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한 느낌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이었다. 시속 수백 킬로미터 속도로 날아가는 날틀 안에서 지상을 바라보면 무슨 새라도 된 듯 우쭐해지기도 하겠지만, 지상에 눌러 붙은 키 작은 모습들이 하찮게 보인다. 아무리 하늘 닿은 바벨탑을 쌓을지라도 결국은 하늘 아래 뫼일 뿐,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자유의 상징인 새마저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살기 위해 뜀박질에 여념이 없는 기껏 하찮은 미물일 뿐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뭐 다를 것 있으랴. 다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빌미를 날개 다친 새에서 얻은 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라 여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생각의 날개를 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신비한 특징이 아닌가, 생각하려니 곧 진공묘유가 걸린다. ‘일어나는 생각이라 했지만, 그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아무리 궁리해도 생각 역시 뜬 구름일 뿐,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그 생각의 뜬 구름을 붙잡지 말고 현재의 자신을 직시하라고 했던가 보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지만 그 생각의 뿌리 역시 공-없을[] 뿐이다. 있는 건 지금 이 순간뿐!

날개는 비상하는 원동력이고 자유의 상징이다. 인간은 날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 뛰어다닐 수 있는 두 다리를 가졌다.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이나, 인간이 지상을 뜀박질하는 것이나 생존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개 없음을 한탄하는 인간의 생각 역시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는 무망한 일이 아닌가. 그 생각의 뿌리는 결국 인간의 인간에 대한 연민이거나 미련과 멀지 않다.

날개 다친 새가 먹이활동을 위해 쓰레기장 주변을 맴돌다가 사람 기척에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살아 있는 존재의 하찮음과 함께 살아 있음의 엄숙성을 동시에 느끼는 묘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날 수 없는 새일지라도 살아 있음[]만이 진리라는 듯이 맹렬했다. 하물며 그 살아 있는 존재의 최고봉에 섰다고 으스대는 인간됨됨이에 생각이 미치자 생각의 뜬 구름이 허망하기만 했다.

어디에 삶의 중심과 무게를 두어야 할까? 아니 이 존재의 허망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결국은 치열함 생존의 몸부림-날갯짓이나 뜀박질이나 허망한 삶의 한계를 보일 뿐인가. 그래서 없는 생각[]를 낳아, 있는 날개[]를 다칠 뿐이다라고 결구했다. 생각의 근거는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생각인 듯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미련이요 미망이며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없는 생각-미련, 미망, 욕망으로 있는 날개-존재의 구체성, 유기체적 특성마저 다치게 하는 것이 인간은 아닌지……

[존재]가 의미 없다는 것도, 허무감에 패배한 자의 넋두리도 아니다. 다만 인생이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는 것[깨달음]이 곧 해답에 이르는 길임을 짐작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어쩌자는 것도 아니다. 시적 정서를 통해서 지금-여기를 바투 그려내는 것 역시 영혼을 풍요롭게 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영혼이라 했지만 그 실체는 곧 생각과 느낌이 전부다.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는 곧 의 됨됨이다. 생각하는 힘과 느낌의 깊이와 넓이가 곧 나를 이룬다. 그렇게 이루어진 의 성장[변화]만이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