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는 하나님, 무차별 하느님”
“차별하는 하나님, 무차별 하느님”
  • 김규원
  • 승인 2023.08.21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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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29

 

무녀도교회 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하나님은 무녀도를 사랑하십니다!

 

중국인들 집 벽에는 자가 거꾸로 쓰여 있다

하늘에 계신 분 읽기 좋으시라고

 

그분이시라면

즐겨 잘못 읽으실 것이다

 

하느님은 무녀도 사랑하십니다!

 

-졸시즐거운 난독증難讀症전문

 

새만금방조제 덕분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곳이 있다. 군산이나 격포에서 배를 타고 가도 한 시간 이쪽저쪽이 걸리던 고군산열도가 이제 뭍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신시도>에서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를 들르고 <장자도>까지 다리가 놓이고 도로가 뚫려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무녀도巫女島를 지나다가 교회의 벽에서 발견한 문구를 보고 언뜻 하느님[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의구심이 일었다.

그러면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카인>이 생각났다. 아담의 두 아들 형 카인은 농사를 지어 얻은 소출로, 동생 아벨은 가축을 잡아 하늘의 제물-번제물로 바친다. 하나님은 연기가 매우 짙게 피어오르는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여 축복해 주시고, 보잘것없이 연기가 피는 카인의 제물에는 축복하지 않는다. 이로써 하나님은 형제들이 땀 흘려 거둔 소출로 바친 제물도 차별하는 신이 되고 만다.

결국 질투를 이기지 못해 동생을 죽인 형 카인은 구약성경이 밝혀 놓은 신의 모순된 사건마다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하여 질문하고 회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내레이터가 된다. 인류를 사랑하는 신神이라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굽힐 수 없었다. 질투하는 신, 의심하는 신,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신, 이런 신이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 할 수 있을까?

‘어느 성서나 그것은 문자화된 일종의 기록이다.’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따라 현실은 매우 높은 장벽이 놓인다. 어느 시대나 이 불통과 단절의 원인은 합리적 의심과 비합리적인 맹신 사이에서 벌어졌다. 전근대사회를 지탱하며 신분사회를 유지했던 맹신도 그것의 일종이다. 어찌 전근대사회뿐이겠는가? 현대라고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 신념화된 이념의 다름, 사는 곳에 따라 고착화된 편견, 심지어 학력과 재력과 출신성분에 따라, 더구나 성별과 재산의 다과에 따라 벌어지고 있는 간극과 단절을 생각하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편협하고 구제 불능한 존재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인지적 진실이 사회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신의 영전에 무릎 꿇고 바치는 구원의 기도처럼, 시는 그저 화자가 느끼고 봉착한 현실을 엉뚱하게 읽는 체험을 통해서 구제 불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구제 가능한 하나의 틈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단절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한줄기 빛을 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수천 년 신봉해온 토착신앙 샤머니즘[巫俗信仰]이 미신이라며 내친이래, 이 땅은 외래종교의 터전이 되었다. 종교의 도래는 외세의 도래와 일치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강자의 편이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의문에 항의하는 것은 이론가들의 몫이며, 시의 눈[詩眼]은 그저 우리가 현실을 잘못 읽듯이, 하느님도 때론 즐겁게 잘못 읽어 [인간]무녀巫女도 사랑하는 하느님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무녀도’는 ‘巫女島’다 무녀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물론 무녀도에 사는 사람들도 사랑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 속에는 ‘무녀巫女=巫堂’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해 주실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성서는 문자화된 일종의 기록’이라는 견해에서 한 발 더 나가면, ‘성서는 가장 빼어난 문학작품이다’는 견해도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진 대다수의 견해이기도 하다.

신의 존재 여부를 믿고 따르건, 믿지 않고 거부하건 성서가 문학작품일 수도 있다면 굳이 신의 가르침이나 규약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질 필요가 무엇이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런 견해를 통해서 본다면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십계명에 밝힌 신이어도 무녀[무당]을 사랑할 리는 있을 것이라는 긍정의 효과를 교회 벽에 써 붙인 선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오래 전에 중국을 여행하다 보니 인민들의 주택 벽에 복福 자를 크게 써놓았는데, 거꾸로 쓰였다. 이상해서 가이드에게 물으니, 복을 주시는 분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기에 편하시라고 그렇게 썼다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무녀도를 사랑하십니다!”는 선언도 무녀도 사람들 보라고 썼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시라고, 그래서 ‘무녀도島’만 사랑하지 마시고, ‘무녀도’[이때 ‘~도’는 역동보조사다] 사랑하시는, 통이 크신 하나님이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런데 사실 이러자면 하나님께서 ‘난독증’을 앓고 계셔야 가능하다. 교회에서 내건 선언문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서, 행여 하나님께서 섬 무녀도를, 무당 무녀로 읽으시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무녀도 사랑해 주시면 다행이겠다.


 

 

 

 

 

 

새만금방조제 덕분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곳이 있다. 군산이나 격포에서 배를 타고 가도 한 시간 이쪽저쪽이 걸리던 고군산열도가 이제 뭍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신시도>에서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를 들르고 <장자도>까지 다리가 놓이고 도로가 뚫려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무녀도巫女島를 지나다가 교회의 벽에서 발견한 문구를 보고 언뜻 하느님[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의구심이 일었다.

그러면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카인>이 생각났다. 아담의 두 아들 형 카인은 농사를 지어 얻은 소출로, 동생 아벨은 가축을 잡아 하늘의 제물-번제물로 바친다. 하나님은 연기가 매우 짙게 피어오르는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여 축복해 주시고, 보잘것없이 연기가 피는 카인의 제물에는 축복하지 않는다. 이로써 하나님은 형제들이 땀 흘려 거둔 소출로 바친 제물도 차별하는 신이 되고 만다.

결국 질투를 이기지 못해 동생을 죽인 형 카인은 구약성경이 밝혀 놓은 신의 모순된 사건마다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하여 질문하고 회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내레이터가 된다.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굽힐 수 없었다. 질투하는 신, 의심하는 신,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신, 이런 신이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 할 수 있을까?

어느 성서나 그것은 문자화된 일종의 기록이다.’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따라 현실은 매우 높은 장벽이 놓인다. 어느 시대나 이 불통과 단절의 원인은 합리적 의심과 비합리적인 맹신 사이에서 벌어졌다. 전근대사회를 지탱하며 신분사회를 유지했던 맹신도 그것의 일종이다. 어찌 전근대사회뿐이겠는가? 현대라고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 신념화된 이념의 다름, 사는 곳에 따라 고착화된 편견, 심지어 학력과 재력과 출신성분에 따라, 더구나 성별과 재산의 다과에 따라 벌어지고 있는 간극과 단절을 생각하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편협하고 구제 불능한 존재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인지적 진실이 사회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신의 영전에 무릎 꿇고 바치는 구원의 기도처럼, 시는 그저 화자가 느끼고 봉착한 현실을 엉뚱하게 읽는 체험을 통해서 구제 불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구제 가능한 하나의 틈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단절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한줄기 빛을 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수천 년 신봉해온 토착신앙 샤머니즘[巫俗信仰]이 미신이라며 내친이래, 이 땅은 외래종교의 터전이 되었다. 종교의 도래는 외세의 도래와 일치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강자의 편이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의문에 항의하는 것은 이론가들의 몫이며, 시의 눈[詩眼]은 그저 우리가 현실을 잘못 읽듯이, 하느님도 때론 즐겁게 잘못 읽어 [인간]무녀巫女도 사랑하는 하느님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무녀도巫女島다 무녀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물론 무녀도에 사는 사람들도 사랑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 속에는 무녀巫女=巫堂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해 주실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성서는 문자화된 일종의 기록이라는 견해에서 한 발 더 나가면, ‘성서는 가장 빼어난 문학작품이다는 견해도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진 대다수의 견해이기도 하다.

신의 존재 여부를 믿고 따르건, 믿지 않고 거부하건 성서가 문학작품일 수도 있다면 굳이 신의 가르침이나 규약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질 필요가 무엇이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런 견해를 통해서 본다면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십계명에 밝힌 신이어도 무녀[무당]을 사랑할 리는 있을 것이라는 긍정의 효과를 교회 벽에 써 붙인 선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오래 전에 중국을 여행하다 보니 인민들의 주택 벽에 복 자를 크게 써놓았는데, 거꾸로 쓰였다. 이상해서 가이드에게 물으니, 복을 주시는 분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기에 편하시라고 그렇게 썼다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무녀도를 사랑하십니다!”는 선언도 무녀도 사람들 보라고 썼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시라고, 그래서 무녀도만 사랑하지 마시고, ‘무녀도[이때 ‘~는 역동보조사다] 사랑하시는, 통이 크신 하나님이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런데 사실 이러자면 하나님께서 난독증을 앓고 계셔야 가능하다. 교회에서 내건 선언문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서, 행여 하나님께서 섬 무녀도를, 무당 무녀로 읽으시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무녀도 사랑해 주시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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