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찾아 도시사막을 배회하다”
“배움을 찾아 도시사막을 배회하다”
  • 김규원
  • 승인 2023.08.07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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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28

 

 

내가 사막에 살면서,

어두운 낮에도, 별 듣는 밤에도

귀를 크게 열어두는 것은

그러므로—

이슬발자국이나 모래뜀박질 소리에도

나로 하여금 나를

바투 뛰게 하려는 것이다

누군가는 풀무질하는 허무 때문이라지만

나를, 허무는 자리마다 채우려는

고요한 배고픔 때문이다,

-졸시「사막여우」전문

 

나는 사막에 살고 있다. 이런 자각은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는 자각과 맞물려 있다. 어쩌다가 거짓말처럼 여우비가 다녀가기도 하고, 어쩌다가 물씬 내린 밤이슬로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경우도 있겠으나, 결국은 사막일 뿐이다. 사막을 흔히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가혹한 환경으로만 안다. 그러나 사막에도 유기체가 살고 있으며, 그 유기체는 자신의 생존방식을 더욱 세련되게 가다듬어 가면서 가혹함을 이겨낼 줄 안다. 인간의 사막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생존의 방식을 더욱 세련되게 가다듬으며 주어진 생명줄을 태우고 있다. 사막은 사막 나름의 생존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생존방식에서 벗어나기를 자청할 때 사막은 자신이 지닌 가혹함을 서슴지 않고 보여준다.

샤카모니[釋迦牟尼]의 ‘고행상’을 본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육체를 저런 경지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니!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오른 손을 왼손 위에 얹었다. 육체의 흔적만 남아 있고 그 기능이 모두 육탈된 모습이다. 몸의 흔적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살의 흔적이 사라진 얼굴로 어떻게 형형한 미소를 감돌게 할 수 있을까?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안에 있을 허파는 어떻게 공기를 호흡할 수 있을까? 견갑골로부터 양팔로 뻗어 내린 뼈는 한갓 나뭇가지의 형상이다. 인간이 몸과 또 다른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몸을 완벽하게 버린 모습, 그 참모습[眞相]을 샤카모니의 고행상에서 엿본다. 몸을 지웠으니, 남은 것은 과연 그 ‘무엇’일까?

인간이 몸과 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니 구성이라면 구체적인 어떤 질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인간의 몸 안에 맘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야말로 ‘생각’이다. 몸이 맘을 들려다 볼 수 없으니, 그냥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내 몸 안에 들어 있는 내 맘을 내가 들여다 볼 수 없다? 그게 진실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맘이라고 했지만, 실은 맘으로 응집할 수 있는 몸 아닌 것들의 총칭을 맘이라고 본다. 넋과 혼, 느낌과 생각, 정신과 영혼, 의식과 의지… 맘에 담기는 것들은 많다. 그 말들의 쓰임에 약간의 다름이 있긴 있으나, 이들의 공통점은 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몸이 아닌 것들이 모두 몸의 작용으로부터 비롯하다니!

한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집적이다. 내가 사막에 살고 있다는 현재의 자각은 그러므로 과거 사막의 삶이 집적된 결과일 뿐이다. 아직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무렵에 사막이 초토화되었다는 것은 몸이 지탱하기 벅찬 사막 환경일 것이다. 전쟁도 그 중의 하나이며, 전쟁으로 인하여 촉발된 결핍-양친의 상실도 그럴 터이다. 그것은 낮도 어두웠으며, 밤은 또 밤대로 별들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듣는[떨어지는]’ 밤이었을 것이다. 낮도 어둡고, 밤엔 별들마저 떨어지는 어린 환경이 사막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기관이 아연 활성화된다고 한다. ‘어두운 낮’과 ‘별 듣는 밤’에 사막의 삶-생존이 가능케 하려면 그나마 ‘청각’이라도 열어두어야 한다. 귀라도 바짝 열어두고 있어야 시각이 놓친 먹을거리를 사막에서 구할 것이다. 그 먹을거리가 ‘몸의 양식’이 아니었다. 순전히 몸이 버린, 몸이 잃은 맘의 양식이었다. 몸을 버리고[버려지고] 맘의 양식을 구하는 일은 또 다른 의미의 고행이라 여길 법하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배움이었다.

학교가 반드시 배움의 전당만은 아니었다. 그저 또래집단이 함께 사막을 건너가는 법을 익히는 시공時空일 뿐이다. 그래도 그 시공의 때를 놓치고서 스스로 그 시공을 뒤늦게나마 찾아 나선 것이 기특하다. 어떻게 어두운 낮에, 별 없는[듣는] 밤에 그렇게 스스로 배움의 시공을 찾아 나설 수 있었을까, 내가 나에게 물어도 그저 ‘사막의 생존법’ 말고는 다른 뾰족한 대답이 없다. 누구는 학마學魔에 들렸다고도 하고, 누구는 출세지향의 자기도취에 빠졌다고 하였으며, 또 누구는 그저 현학 취미일 뿐이라고 하기 쉬운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막이 아닌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기 경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치부했다.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당시 그 사막을 건너는 유일한 생존법으로 학교를 선택했던 것은, 두고두고 크게 열어두고 살았던 내 사막 삶의 다행이었음을 회고한다. 그렇게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시절을 고행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이 지금은 듣기도 어려운 시대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사막에서는 참 귀한 말의 파장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뭔가 먹을거리를 찾아 도심의 미로를 찾아 헤매고, 밤이 되면 크게 열어둔 귀를 지니고 밭을 가는 심정이었다. 그런 고행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해답이 없는 시공이었다.

대학이라는 곳도 밤과 낮의 시간을 바꾸어 다녔다. 사막이라는 곳은 배고픈 자가 부지런히 돌아다니지 않으면 몸의 먹을거리는 물론 맘의 안식처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대학에서 겨우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를 짐작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스스로 찾아 나선 먹이활동에서 이것을 발견한 것은 사막여우에게는 기막힌-행운이었다. 물론 양친께서 못다 이루신 배움의 그림자와 조부께서 남기신 한학의 붓 자국과 먹 냄새가 짙게 배어 있음도 한 까닭이라면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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