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존재할 것인가 살 것인가?”
“떠남, 존재할 것인가 살 것인가?”
  • 김규원
  • 승인 2023.07.24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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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27

 

뱁새 한 쌍이

앞집 바람벽 구멍에 신혼집 차리느라

야단법석을 떨더니, 얼마 지난 뒤 고요만 남았다

네가 나를 벗어나,

제 날개를 얻었으므로

 

동네쌈지공원에 깁스한 채 서있던

주소 옮겨온 금강송 한 그루

비바람 거센 여름 태풍을 맞아 쓰러졌다

내가 너를 버려,

황토뿌리를 잃었으므로

 

네가 나에게 이별을 키스하건

내가 너에게 손수건을 흔들건

 

아침놀을 떠다가 저녁놀을 물들이는 나날

바닷새 날개 접는 밤이 되면

내가 나를 배웅하느라

파도는 쉬지 않고 오고감을 노래할 것이므로

 

-졸시떠남전문

 

요즈음 여행 붐이 일었다. 이런 현상을 오버-투어리즘 over-tourism 이라느니, 보복관광이라느니, 표현의 강도가 매우 심해지고 있다. 앞의 표현은 정도에 지나친 관광이란 뜻이고, 뒤의 표현은 코로나19로 막혔던 관광 욕구에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관광 붐이 지나치게 일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주민 수의 40배에 달하는 관광객이 몰려들어 주민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기 관광지이다 보니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캐리어[가방] 끄는 소음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곳 주민들은 “Tourist Go Home!"이란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떠돌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최고 인기 관광지에 화장실이 없자 관광객들이 아무 곳에나 실례를 하여 골치를 앓는다는 것이다. 당국에서는 ‘대변지도’를 만들어 수거에 대비하고 있으며, 급기야 일회용 대변 봉투를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면서, 관광지 보호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수요를 감당할 길이 막연하다는 것이다.

여행은 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필수 요소다. 여행이 없다는 것은 한 곳에 붙박이로 산다는 것인데, ‘머리털 검은 두발 달린 짐승’의 본성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시로 ‘떠남’을 당연한 삶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래서 낯선 곳을 향한 발길을 억지로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화와 문명의 대부분은 이런 인간들의 여행이 빚어낸 것 아닌 것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즈음에는 ‘여행가’ ‘여행작가’ ‘여행 사진작가’라는 분야의 전문가도 등장한 시대다. 여행만을 전문으로 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니, 신나는 세상임은 분명하다. 예전에 여행은 삶의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때의 여유란 말할 것도 없이 시간과 경비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생활 전선에 매달려 살다 보면 [시간과 경비에서]여행은 그저 버킷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목표 목록]에나 설정해 둘 정도였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불문코 떠나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 증거를 적극적으로 확실히 보여주라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건, 세상에 아주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생물처럼]단지 존재할 뿐이다.”[오스카 와일드] 똑같 길을,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변화가 없는 삶이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곧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 여행은 성장을 위한 변화를 만드는 동기라는 것!

우리가 흔히 ‘여행’이라고 부르지만 떠남에는 세 가지 정도의 다른 범주가 있다고 한다. ‘관광, 여행, 방랑’이 그것이다.(여행작가. 노동효의「지구둘레길」) 한나절 혹은 며칠 일정으로 명승지를 둘러보는 걸 관광이라고 한다면, 방랑은 긴 시간을 두고 한 나라나 한 대륙 이상을 거니는 행위다. 관광과 방랑 사이에 여행이 존재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자]와 관광[객]’을 저마다의 기준으로 분류한다. 이 기준은 당사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앞의 글을 쓴 이는 그런다. “여행이 방랑으로 넘어갈 순 있지만 관광이 방랑으로 바뀌진 않는다고 한다. 내적 변화[마음가짐]은 주로 방랑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럴 것이다. 여행이 관광으로 삶의 여유를 낭비할 수도 있지만, 여행이 방랑으로 방향을 바꾸어 전혀 낯설고 새로운 삶의 경지를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변화의 동기요, 변화는 성장의 에너지며, 성장은 날마다 새롭게 살고 있다는 자기증거가 될 만하겠다.

떠남은 여행이다. 여행이 관광과 방랑의 여지만 있는 건 아니다. 어린 새가 날개를 달고 둥지를 떠나 제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도 떠남이다. 이때의 떠남은 네[새끼]가 나[어미]를 벗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요 방랑이 될 것이다. 낙락장송 소나무가 가지 쳐내고 뿌린 절단당한 채 옮겨왔다. 여름 태풍에 쓰러져 누렇게 시들어간다. 내[소나무]가 너[황토뿌리]를 잃은 대가를 치른다. 이들의 떠남은 방랑이고 여행이지 관광은 아닐 것이다.

아침놀은 철학자[니체]의 입을 빌려 말한다. “사람은 삶을 알아야 한다. 삶은 사람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몫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나를 알아야 한다.” 저녁놀은 황홀하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삶을 그린다. 파도는 쉬지 않고 “참 여행은 내가 나를 떠나는 것, 존재를 벗어나 적극적인 방랑-광대무변한 하늘로 회귀하는 또 다른 삶”이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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