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常春, 사랑은 언제나 봄이다
상춘常春, 사랑은 언제나 봄이다
  • 김규원
  • 승인 2023.04.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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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17

 

화분에 담긴 장미

빨간 열정을 그냥 외면했다

[사랑이 사랑이되 사랑 아닌 사랑처럼]

 

시나브로 피고 지고 피더니

끝내 시든 종교 차가운 사상에 시달리다

육탈된 욕망의 유골

 

겨우내 편지 한 장 비 한 방울

전송되지 않아도

 

황무지 내 가슴에

화들짝, 열반을 열고 육화되는

[사랑이 사랑이되 사랑 아닌 사랑처럼]

 

-졸시상춘常春- 내 서정의 기울기8전문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서 다음 두 가지를 모른다는 것은 사람됨의 한계를 결정짓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실체는 그가 유래한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정상으로 보인다. 과학을 동원하건 아니면 논리적 합리성을 적용하건 실체의 유래를 밝히려고 고집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생명의 신비는 쉽게 풀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생물학자는 인간의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풀잎 하나 만들어낼 수 없다고 그 한계에 탄식한다. 인간이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찮게 보이는 잡초 한 포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랬더니, 한 철학자는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고 단언하며 생명의 소중함은 대소, 경중, 귀천이 따로 없다며 생명의 가치를 엄숙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이라는 실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막연해 하는 것도 우리가 가진 근원적 의문이다.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왔으며[탄생], 어떻게 살다 어디로 가는지[죽음] 도무지 알 길이 막막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막연한 의문 때문에 두 가지 현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나는 모르니까 한사코 알고자 하고, 둘은 모르니까 미리부터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간이 빛을 생명의 힘으로 여기는 것은 호기심의 창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사람다운 사람의 특징이다. 호기심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싹튼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 두고도 마음 편한 사람은 없다. 이 호기심이 지적 노력과 결합하여 오늘날의 문명-문화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인간은 어둠을 두려움의 실체로 여긴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뭔가 알려는 호기심의 창문을 장막으로 가리는 것이 어둠이다. 그럴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찌 보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앎과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작용해온 결과로 보아도 어긋난 진단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과학의 궁극적인 탐구 목적도 실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탄생의 비밀을 밝혀서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데 기울이는 과학의 노력은 매우 치열하다. 이와 달리 철학, 종교, 역사, 문학 등 대부분의 인문학은 삶의 실체적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하여 역량을 쏟아 붓는다.

 

그 중에서도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사람이면 누구나, 아니 생명을 가진 것들이라면 예외 없이 죽음, 생명이 다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산다는 것,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곧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 몸부림에서 초연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려 애를 쓴다. 탄생은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이미 벌어진 사태라면, 그래도 죽음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려 한다. 그 여지 때문에 인간은 사후 세계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유체이탈[遺體離脫: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분리되는 일]이네, 임사체험[臨死體驗: 의학적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체험] 등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끈다. 그 이유도 실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의 발동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반응으로 보인다. 아무도 죽음 너머의 세계를 다녀온 적이 없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노력들, 죽음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인류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죽음 너머의 세계는 쉽게 문을 열지 않는다.

 

저 지난 봄 베란다에 장미화분을 들였다. 이따금 화분에 물을 주면 잊지 않고 화사한 꽃을 피웠다.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며 봄여름 지나 늦가을까지 잘도 피고 잘도 졌다. 겨울이 오자 장미 화분을 실내에 들여놓을 수도 없고, 그렇대서 시든 화분에 물을 주면 얼어붙을 것 같아서 그냥 방치했다. 지난 동지섣달부터 올 춘삼월까지 그랬다. 먼지가 푸석거릴 정도로 화분의 흙이 말랐다. 가시뿐인 앙상한 가지를 잘라내고 화분을 비우려다 보니, 아니 글쎄 그 말라비틀어진 흙을 비집고 장미 새 순이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저 혹독한 겨울을 맨몸으로 견뎠으니 으레 장미 목숨 다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장미는 온몸으로 봄을 끌어안은 채 겨울을 떠나[離脫] 있었던 모양이다. 몸이 말라가건 말건, 육신은 말라비틀어진 채로 남겨두고[遺體] 장미의 넋은 그냥 봄을 살아낸[常春]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죽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음을 알겠다. 항상 봄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을, 으레 찾아오기 마련인 겨울에 몸은 물론 마음까지 버려두는 인간은 새 봄을 맞이할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사람의 봄은 어디 있을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랑 말고 어디에서 인간의 봄을 찾을 수 있겠는가? 종교마저 당파성으로 신성을 삼으려는 세태, 정의와 양심의 문제를 이념으로 둔갑시키느라 총알 없는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나라, 사랑은 정녕 종적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그런다. 사랑은 사랑이되 사랑 아닌 사랑만이 넘치는 불화의 세계에서 장미의 상춘으로 사랑의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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