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선생을 만나다
이인호 선생을 만나다
  • 전주일보
  • 승인 2012.03.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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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문화야 歲月이에게 물어봐. 我人 이 곳 머물던 자리. 世間만 어질러 놓고 어제 바위에 박혀 藝道를 잉태하고 있다고.“  십리 북쪽에 미륵산과 용화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그만큼에 왕궁탑이 있는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인도(引導) 이인호(78) 선생 자택, 예도원(藝道苑)이란 표지석에 적힌 내용이다.

꽃샘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차가운 날씨에 선생을 취재하러 가던 길이다. 예도원 안팎에는 달마상과 포대화상, 석탑과 석등, 괴석이 무수해 불교적 색채가 짙고 이색적이다.

인도 선생은 달마와 난, 탱화, 단청, 산수화, 승무, 법고 등 무수한 분야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 예도원 주변에는 조통달 명창과 김옥수 석공예 무형문화재 등이 살아 마한백제문화 산실임을 알 수 있다. 불교적 터전과 풍수로도 유명하고, 경관도 빼어난 미륵산과 용화산은 현대판 시인묵객과 도자기, 조각 등 수많은 예술가가 골짜기마다 둥지를 틀고 있다. 영산의 기운을 쐬는 것이 작품활동과 건강에 좋기 때문일까?

인도 선생은 1935년 금마면에서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 종손인 부친은 일곱 아들을 잃고 방황하고 어머니 혼자 선생을 낳고 신음 중인 것을 탁발 왔던 금산사 소진산 스님이 목격한다.

스님은 "아이가 오래 살려면 부처님께 귀의시켜야 한다"고 말해 선생은 일곱 살에 금산사에 들어가 불교의식, 단청, 조각, 승무, 법고 등 불교예술을 전수 받고 장단과 가락을 접목키 위해 故박초월에게 국악도 깊이 터득한다. 이후 총무원장을 지냈던 손경산 스님에게 引導라는 불명 겸 아호를 받고 사회인으로 단청과 불화를 배우고 포교도 한다.

71년 단청문화재 164호로 지정되고 마곡사와 건봉사, 남산 팔각정, 대한문, 현충사 등 무수한 단청을 직접 맡는다. 그림과 소리를 접목시킨 한국화, 불화, 단청, 난화 등 일본과 미국, 캐나다에서 가진 16회 전시회를 포함해 41 차례나 개인 및 단체전을 가진 선생의 작품은 선이 굵고 대담하며 선명. 우아하다는 평을 받는다. 불심과 회화성, 붓의 농담과 자비심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억세고 강한 힘이 솟구치는가 하면 머리카락보다 사실적이고 섬세해 감탄을 자아낸다.

한국미술작가협회와 국악협회이사도 역임했다. 서울 인사동 ‘引導화실‘은 전국각지 애호가들이 몰려 그림이 불티나게 팔렸다. 수입은 불우이웃이나 친구에 아낌없이 나눠줬다. 남을 위한 삶은 평생 계속됐다. 풍요로운 삶이 보장됐으나 首丘初心,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마한과 백제의 옛 땅, 미륵사지와 왕궁탑이 어른거렸다. 역사와 문화가 찬연히 빛나는 판소리 고장의 문화예술 발전에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문광부 관계자에 낙향의 뜻을 전하자 편안한 삶을 팽개치려는 것을 이해 못했다. 뜻을 꺾지 못한 관계자는 익산문화원을 예산 등에 혜택을 받는 시범문화원으로 지원해줬다.

92년 금마면에 '예도원'을 세우고 익산에서 본격 활동한다. 1993년 12시간을 죽었다 다시 살아나 사후세계를 경험했다. 남에 피해 주지 말고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후 3대에 걸친 문화원장 재임시는 이리노인회관과 함열노인회관, 익산문화원 건립 등에 도합 5500만원도 기부했다. 지역문화 발전에도 헌신적으로 노력해 혁혁한 공을 남겼다.

익산인물과 살아있는 익산문화, 마을유래 등 17권에 이르는 지역문화관련 도서를 출판했다. 2004년 문화원장을 마친 선생은 그 해 시가 5천만원이 넘는 소장작품 201점을 재(在)제주 전북도민회관 건립자금을 위해 기증했다. 공연과 전시로 제주에 자주 들렀던 선생은 79년, 불모지나 다름없던 제주 최초로 국악공연과 그림 전시회도 갖는다.

선생은 법화사 단청을 그릴 때인 90년 서귀포 도민회 사무실 마련을 위해 밤새 그린 그림을 전시 판매해 당시로는 거금인 3천만원을 기탁했고 추가금액까지 5천만원을 기증했다.

2004년 고희를 맞은 선생은 사교로 얻은 것과 구입작품 등 50인 유명화가와 서예가 작품에다 자신의 작품을 포함해 201점을 전북도민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전시 판매했다. 기증작품은 남농, 석전, 소암, 시경, 경보, 창해, 매천, 동천, 동포, 가산, 아석, 지남 등 내노라 하는 명사의 서화이다.

2005년에는 팔봉도예와 힘을 합쳐 도자기에 달마와 난 등을 그려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선생은 이후 당뇨와 고혈압을 가뿐하게 뿌리치고,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현재도 지인과 멀리서 작품을 원하는 분을 위해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2007년에는 제12회 '익산시민의 장, 문화장'도 수상했다.

‘문화장‘은 최고 권위와 명성은 물론 문화예술 발전에 헌신하고, “富나 특장점을 지닌 사람이 갖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는” 노브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현하는 등 높은 도덕성을 견지한 분에 수여하는 상이다.

인도 선생은 단청, 탱화, 달마도, 범패, 승무, 법고 등 불교예술은 물론 판소리, 무용, 민요, 기악, 농악, 도자기, 산수화, 전통음식, 제례음식, 한국화, 화조도, 민화, 인물도, 사군자, 궁중의상, 제례의상, 한복, 살풀이, 나비춤 등 무수한 분야에 실력을 지녔다. 문화계는 선생을 '1人 10技 80種'이라 칭한다. 한 사람이 10가지 예술분야에서 80종목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는 말이다. 제자 10여명이 무형문화재가 됐으나 선생은 많은 분야에 탁월한 능력 때문인지 아직 문화재가 되지 못해 주변을 안타깝게 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익산문화에 애정이 많다. “문화원은 후임 원장이 탁월해 걱정을 안 하나 전북무형문화재 1호 박갑근 씨가 돌아가시어 ‘목발노래’ 맥이 끊길 위기로 문화원에 위탁해 후진양성을 못한 점이나 기세배전수관이 있으나 제대로 된 기세배가 전수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미륵사지와 오금산성(익산토성), 마룡지, 쌍릉 등의 연계 관광도로 부족, 관광상품 부재, 숙박시설 등 관광시설 낙후 등을 지적했다. 서동축제도 전통과 역사를 살리지 못하고 국적불명의 놀이문화가 많아 문제라고. 선생의 자택에 ‘용의 해‘인 임진년을 기념해 그린 그림이 이채롭다.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어도 따뜻한 봄날은 어김없이 찾아오듯 선생의 건강이 날로 좋아져 익산 문화발전에 기여와 함께 수많은 작품이 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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