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는 민족종교인가 유사종교인가
보천교는 민족종교인가 유사종교인가
  • 김상기
  • 승인 2010.07.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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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의 ‘보천교와 한국의 신종교’
보천교는 1909년 월곡 차경석에 의해 창시된 신종교로, 한국종교 사상 유례 없는 극적인 흥망을 보여준 종교다. 그 극적인 과정이 불과 10년 안에 일어났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에 급격한 성장을 시작, 1922년 거대한 보천교 성전을 착공하고, 1923년에는 수십만의 신도를 가진 사실상 한국 제일의 종교로 우뚝 일어선 것이다.

보천교는 교세가 확장되자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으며, 언론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1923년 10월 월간지 ‘보광’을 창간하고 보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이어 당시 말썽 많았던 ‘시대일보’를 인수했다. 자급자족을 위해 직물공장, 염색공장, 갓공장, 농기계공장도 세웠다. 그밖에 보천교농악단, 기산조합, 보천교 청년단, 보흥여자사립수학, 보천교 소년회 등을 조직ㆍ운영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5년 ‘시국대동단’을 결성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이용당할 수 있는 약점을 갖게 됐고, 민족종교인지 사이비종교인지 갸웃하던 일반의 인식에 보천교는 사이비종교라는 인식을 굳히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보천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 하에서도 기구를 조직하고 웅대한 교전을 축조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건물 일체가 모두 해체된다. 다만 성전 일부인 십일전은 현재 조계사 건물로, 북쪽에 위치한 정문인 보화문은 내장사 대웅전으로 복원돼 현재 남아있다. 일제는 민족의식을 가진 보천교를 탄압하면서 건물을 장작으로 뜯어 팔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시절 한국 제일의 종교로 자리매김했던 보천교를 집중 조명하는 ‘보천교와 한국의 신종교’(신아출판사)가 출간됐다. 보천교는 자칭 ‘600만’ 신도를 자랑할 만큼 일세를 풍미했던 종교였다.

당시 보천교운동이 크게 확산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민족주의적 성향과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보천교가 내선일체와 대동아의 평화를 강조하는 시국대동단을 구성하면서부터 급속한 분열과 해체가 나타나게 됐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그간 보천교는 민족종교였다는 시각이 우세했지만, 이제는 유사종교에 가깝다는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들의 친일행위가 있었다면, 이를 비판하기에 앞서 보천교의 민족운동에 관한 측면을 먼저 살펴보고, 이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있은 다음에 이들의 성격을 재단해보자는 것입니다. 민족운동에 대한 경향성마저 부인한 채 일부 친일행위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연구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의 구성은 1부에서 정읍의 자생종교, 2부 정읍의 종교적 상징성, 3부 정읍과 보천교, 4부 보천교의 민족운동으로 나눠 살펴보고 있다.

저자 김재영은 현재 정읍시문화재 심의위원, 전북사학회와 호남사학회 종신회원,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사, 한국신종교학회 이사 및 종신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주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샘솟는 땅 정읍의 문화’(1998), ‘저항과 변혁의 땅’(20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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