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路下)숲의 가르침
노하(路下)숲의 가르침
  • 구상모
  • 승인 2009.11.2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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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산책을 하며 깊은 상념에 젖고 싶을 때 장수 노하(路下)숲을 찾는다. 내가 거처하는 관사에서 걸어가면 불과 5분 거리에 있어서 아침 저녁 운동 삼아서 한바퀴 돌아오기도 하고 점심시간에는 일부러 찾아가 잠시 쉬었다 오기도 한다.

아파트 창문을 열고 옆으로 길게 시선을 가져가면 손에 잡힐 듯 숲 전체가 한 눈에 드는데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 다가가 숲에 묻혀보아도 노하숲은 한번도 똑같은 옷에 똑 같은 화장을 하고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없다. 일년을 따지면 계절에 따라 다르고 하루 중이라도 이른 아침에 동녘에서 막 떠오르는 햇살을 마주하는 모습과 석양의 노을을 등지고 서있는 저녁의 모습이 다르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보는 이를 위해 늘 새로운 모습을 준비하는 듯 하여 그 정성이 여간 고맙지 않다. 노하 숲은 금강의 발원지인 장수읍 수분리 뜬봉샘에서 시작한 물이 20여리를 내려흘러 이 숲을 감싸듯 흐르는데 고려말 황희 정승의 아버지가 장수 현감으로 재직할 때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황희 정승의 어머니는 동헌에서 300여m 가량 떨어진 단봉산(丹鳳山) 자락에서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렸다고 하는데 그 일대를 가리켜 단봉하전(丹鳳下田), 즉 봉황이 내려오는 형국의 땅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봉강(鳳降)마을이라 하고 황희 정승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며 그 땅을 보호하는 숲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의 노하숲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제(日帝)는 이름을 비하하기 위해 단순히 길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노하(路下)라 고치고 숲 이름도 노하숲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숲을 대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노하숲은 정유재란 당시에는 의병들의 은신처로,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팔공산 공비들을 토벌하는 35사단 장병들의 본부로 쓰였으며, 2002년에는 산림청과 유한킴벌리에서 선정한 제2회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숲이다. 올해는 풍부한 일조량과 알맞은 강수로 예년과 다른 고운 단풍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바른 심성과 창의성을 높여주는 스승

‘아, 우리 아이들을 여기에 일주일만, 아니 하루만 머물게 해도 좋겠다.’ 몇 해 전 어느 가을날 학교 평가를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평가단의 단장이셨던 여자 교장선생님께서 장수에서 첫 밤을 자고, 아침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장수천이 피워내는 안개 사이로 막 모습을 드러내는 팔공산과 노하숲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했던 말이다.

매일매일 딱딱한 아스팔트만 밟고 다니고 각지고 네모난 사각형의 건물들만 보고 살면서, 둥글고 고운 마음들이 거칠어지는 도시의 아이들을 단 하루만이라도 맑고 깨끗한 대자연의 품속에 안겨 주고 싶은 노 교장이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던지던 말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숲이 우리에게 주는 많은 혜택 중에서 목재제공이나 수원보호, 홍수와 가뭄의 예방 등 물질적 가치도 대단하지만 요즈음에는 숲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안정과 정서의 순화, 감성의 함양 등 비가시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숲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공격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바라보거나, 조용히 그 속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준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의도적으로라도 일정기간을 자연과 가까이 하게 하여 산과 들을 보게 하고 위험하지 않게 만들어진 노하숲과 같은 숲속에 들여보내주는 것은 잘 짜여진 도덕교과서보다도 수십 마디 훈화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 아이들의 기본적인 바른 심성을 기르는데 자연만한 스승이 없다.

모든 자연과 숲이 그러하듯 노하숲 또한 한번도 같은 색깔을 반복해 보여주거나 같은 모양을 두 번 보여주는 법이 없다. 약 30여 종에 200여 그루가 모여 모두 다른 굵기와 높이를 가지고 가지마다 잎마다 제 나름의 색깔을 담고 제 나름대로 팔랑대고 있다.

이렇듯 자연속 구성원들의 개성(?)은 하나도 같거나 모방된 게 없다. 모든 새로움과 새로움의 구체물인 창조는 철저하게 달리 생각하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다. 아이들을 자연 속에 묻어놓고 보게 하고, 놀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 자체가 눈에 보이는 자로 잴 수 없는 훌륭한 창의성교육이다.

의도적으로라도 일정기간 동안 아이들을 자연 속에 들여보내서 보고 놀고 느끼게 하는 것이 막힌 교실에 가두어 놓고 잘 만들어진 창의성 신장 교재로 열 번 가르치는 것 보다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 아이들의 창의성을 기르는데 자연만한 스승이 없다.

오랜 기간 자연 속으로 보내보자 주말에 가족과 함께 산에 오르거나 주말농장에 데리고 가는 것도 좋고, 방학 중에 이런 저런 단체에 섞여 체험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좋으나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른 심성과 빛나는 창의성 신장을 위해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한 한두 번의 진통제 처방보다는 장기간 자연 속에 묻혀 있는 아름다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과정의 몇 년 정도 그도 어려우면 한 학기나 1년 정도의 농산어촌 유학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그것도 어렵다면 매년 두 달 정도 농산어촌에 있는 학교로 쉽게 교환학습을 다녀오게 하는 방법도 있다. 만약 귀엽고 소중한 자녀들의 고운 심성과 창의성을 높여주기 위해 자연의 가르침을 옳게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 관내 작고 아름다운 학교, 섬세한 교육과정과 튼튼한 선생님들이 계신 9개 초등학교 모두를 선택의 중심에 얹어드리고 싶다.

한밤 자고 났더니 벌써 교육장실 창 너머로 보이는 노하숲이 멀리 팔공산을 병풍삼아 절정의 단풍을 준비하고 있다./ 전라북도장수교육청 교육장 신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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