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살아나야 한다
백제는 살아나야 한다
  • 고재홍
  • 승인 2009.06.1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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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역사 논단 (외부칼럼)

백제는 살아나야 한다


이 재준




우리 고대사에서 백제의 멸망을 애석히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가정이지만 만약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초토화 되지 않고 1천년 이상 더 문화를 꽃 피웠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 백제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의 위상은 어떻게 변모했을 까.

백제는 가장 강성했을 때 망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김춘추의 대당 백제 정벌 외교도 실은 신라가 여러 전쟁에서 백제군에 번번이 패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멸망이 목전에 이르렀다는 위기감에서 였다. 그가 당 황제 앞에 나가 호소한 내용에도 “강대하고 교활한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아국을 침공하여 당(唐)을 향하는 조공의 길을 막기 때문(意譯)”이라고 피력한다.

백제의 중흥을 웅진(熊津)기 무령왕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주에서 사비로 왕경을 옮긴 성왕 대 부터가 아닌가 한다. 성왕은 일본과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고 국력회복에 온 힘을 기울인다. 왕은 백제의 국호를 남부여로 정하는데‘부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백제의 정통성이 부여였음을 내세운 것이다. 국운 융성의 염원과 광대한 만주고토 회복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나 성왕은 매우 불우한 왕이었다. 서거 일 년 전 553년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 시집보낸다. 그러나 지금의 옥천 관산성에서 신라군관 도도(都刀)에 사로잡혀 목을 베인 것이다. 왕녀를 진흥에 바친 보답치곤 잔혹한 선물였다. 전통적인 나제동맹은 이로써 깨지고 신라 백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극단을 달리게 된 것이다.

선화공주 설화의 주인공 무왕 역시 영주로 기록 된다. 무왕도 대 신라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승리와 실지를 회복한다. 무엇보다도 무왕은 성왕에 이어 불교 중흥의 장을 연다. 익산 천도의 의지로 왕궁평을 설계했으며 왕흥사와 동양최대의 가람 미륵사를 창건한다. 국력이 강대하지 않았으면 이 같은 큰 불사를 생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의 규모나 출토 된 유물은 당시 백제의 문물이 어느 수준이었나를 말해 준다. 미륵사지 석탑 금제 사리기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백제 녹유 와당의 균제미, 정교한 각종 유리제품등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최근에는 왕궁평 5층석탑 건조 시기를 무왕대로 해석하고 출토 된 금제 금강경판과 사리장치를 모두 백제 유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애석한 것은 미륵사지나 왕궁평 혹은 부여 고토에 백제 당탑(堂塔)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륵사지의 규모나 초석의 배치, 왕궁평의 건물지로 보아 당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했을 텐데 어디 하나 남아있지 못하다.

필자는 지난 70년대 후반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나라 교또 오사카등 주요 사적을 다니면서 백제의 잔영을 찾기 시작했다. 고류지(廣隆寺) 호류지(法隆寺)에서 필자는 숨이 멎는 감동을 맛보았다. 그것은 바로 사라진 백제 건축물이 고스란히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들은 모두 백제 장인에 의해 혹은 그 후손들이 의해 지어진 건축물들이었다. 비록 백제의 건축물들은 1천6백여년 전 모두 불타 사라졌지만 일본 땅에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주 책 출간 일로 일본을 방문, 재일동포 사학자들과 만난일이 있다. 한결같이 이들은 일본 검정 교과서 왜곡이 날로 더 심각하다고 들려주었다. 최근에는 왕인박사의 천자문 전래까지 부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고도에 기적처럼 우뚝 솟은 많은 백제의 화신이 살아있는 한 이들의 획책은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늦었지만 이제 부터라도 대백제(大百濟)를 살려야 하지 않을까. 허허로운 미륵사지에 웅장한 백제 건축물을 세우고 왕궁평 왕경 건축물도 복원하면 어떨까. 백제가 살아나야 일본의 억지스런 행동도 종지부를 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필자/언론인.한국미술사학회회원.전 지방문화재위원)




- 필자는 東國大 大學院에서 韓國史를 전공했으며

저서로는‘高句麗 瓦塼’‘한국의 廢寺’‘世態 漫筆’ 등 저서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宋代佛畵 의 연구, 金製 千手經연구, 伽倻寺址考, 沙啄 部屬銘 平瓦 연구’등이 있다. 전 국도일보 대표, 현 위크리 페이퍼(석세스)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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