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悲哀)
비애(悲哀)
  • 전주일보
  • 승인 2024.02.2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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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섭/수필가
문광섭/수필가

비애란 슬픔과 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올해 초, 효자동 홈플러스 도서관에서 수필문학동아리 수업을 마치고 회원들이 맛있게 점심을 먹은 뒤 헤어졌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안행교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아직은 겨울의 정점인데도 한낮이라 그런지 날씨가 포근했다. 버스정류장에는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여성회원도 다른 길로 먼저와 대기하고 있어서 함께 버스에 올랐다.

나는 앞쪽 운전기사 뒤 둘째 좌석에 앉고, 여성분은 뒤쪽 출입구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KT 남전주지점 사거리를 지나서 서부시장 정류장을 출발하고서다버스 운전기사가 혼자서 구시렁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점점 톤을 높혀가며 구시렁거리는데, 귀를 쫑긋해서 들으니 학생 요금운운했다.

그때 내 앞 좌석에 앉았던 구십 가까운 노인이 맨날 글케 타고 다녀도 암말 않터니만, 오늘은 왜 그래 싼댜라고 투덜댔다그러자 승강구 쪽에 앉았던 여학생이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통에 넣으려 하자, 운전기사가 넣지 말라고 제지하고는 이런 양반은 버릇을 고쳐야 돼하고 노인에게 윽박질렀다.

학생 요금이 1,250원이니까 불과 200원 차이다. 또한 노인한테 함부로? 더구나 여학생이 천 원을 꺼내 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때 노인이 또다시 왜들 이렇게 난리여?”라고 혀를 찼다나는 가만히 있다간 사고라도 날 것만 같고, 부아도 치밀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노인 귀에 꽂힌 보청기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님, 이 노인 양반이 청각장애자시네요! 그만하시지요.”라고 했더니, 앞쪽에 달린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는데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이내 조용해졌다가슴이 멍하니 아려왔다.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건가? 또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삼천동 가곡 교실에서 수업을 마친 뒤 89번 버스를 타고서 제일 앞쪽 좌석에 앉았다. 시내를 가로질러서 중앙성당 건너편 정류장에서다. 팔순쯤 돼 보이는 할머니가 힘들게 버스에 올라서 카드를 대는데 잔액이 부족합니다라고 멘트가 나왔다. 할머니는 조그만 지갑을 뒤졌으나 천 원짜리나 동전도 없는지 쩔쩔매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할머니, 그냥 가셔서 자리에 앉으세요!”라고 했었다나는 얼른 운전기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럴 수도 있다는밝은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를 몰았다. 육십 가까운 운전사는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어른을 공경하듯 차분하였다.

집에 가는 내내 즐겁고 상쾌했었다. 집에 도착해서까지도 운전기사가 던진 그 고운 목소리가 메아리로 남아 훈훈하니 아름다웠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감정이 달라서 획일적일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오늘 일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팔순에 든 내 친구들 가운데는 귀가 어두운 사람들이 많다. 나도 관상동맥 대수술 후유증으로 왼쪽 귀에 노인성 난청이 와서 한동안 아내와 입씨름을 자주 했다. 특히 식사할 때 심했다. 식탁이 싱크대를 마주 보았는데, 아내가 내 왼쪽에서 일해야 편한 구조였다. 그러니 왼쪽에서 말하면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빨리 병원엘 가보라고 소릴 질렀다.

아내 성화에 친구 아들이 원장으로 있는 ‘W 이비인후과의원을 찾아갔더니, 친절하게 세심한 검사를 마치고선 아직 보청기를 낄 정도로 심한 게 아니니 조금 지켜보자고 하였다. 대수술 후유증으로 잠시 난청이 온 것 같다고 했다. 몇 년 지나더니 난청이 사라졌다. 지금은 상당히 양호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어서 행복하다.

하지만, 언젠가 나에게도 그럴 날이 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오늘처럼 5~60대 젊은이들한테 봉변당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렇다고 걱정을 달고 살 수도 없고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사람이 살다 보면 늙는 거야 어쩔 수 없으나, 정신만은 본인이 잘 차리면 화()는 면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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