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비무장지대가 있었다
우리 집에는 비무장지대가 있었다
  • 김규원
  • 승인 2024.01.11 14: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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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수필가
김영숙/수필가

우리 집에는 DMZ(demilitarized zone) 즉, 비무장지대가 있다. 이곳은 부부간의 상호무력 충돌을 방지하거나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암암리에 형성되었으며, 여기서는 언어폭력, 당신 탓, 고집불통, 소통 부재 등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는 행동은 되도록자제해야 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며 잘 살겠노라 약속하며 결혼했지만, 사는 내내 사랑만 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귈 때는 만나기만 해도 좋지만, 결혼은 현실이고 실전이다.

내 나이 반절 이상을 남편과 살았지만, 돌아보니 서로 자신을 버려야 할 때도 있고 인내심을 갖고 서로를 기다려줘야 할 때도 있고 언제든 서로의 편이 되어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배려가 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무던히도 많은 부부싸움이 동반되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서운했고 자유를 잃었다는 답답함에 오해도 많이 했고 남편을 내 아집의 틀 속에 맞추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다투기도 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서로 타협점을 찾아내고 미운 정도 들었으니 부부싸움도 인생의 양념처럼 필요하긴 했다.

싸운다는 것은 아직 그만큼의 관심이 남아있다는 증거라고 혹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이는 대청소하고 나면 집안이 쾌적해지는 것처럼, 싸움도 잘하면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의 응어리가 해소되기도 하기 때문은 아닐까?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사랑에 눈멀어 맺어진 인연이니, 어찌 날마다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날 수 있으랴? 흔히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3년이라 했거늘, 그 후부터는 그놈의 정이 뭔지 정에 발목 잡혀 사는 건 아니었을까?

삼사십 대는 싸울 때면 둘 다 자기의 자리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로 시작되었다. 나는 내 자리에서 꿈을 꾸고, 남편은 남편 자리에서 각자 현실을 무겁게 짊어지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버리지 못한 자존심을 앞세워 충돌하다가 그로 말미암아 서로에 대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서로의 상처를 후벼파기도 했고 둘이 가꾸어왔던 그동안의 행복을 일순간에 모두 덮어버릴 태세로 돌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격한 다툼이 있어도 자녀가 나타나면 우리는 잠시 싸움을 중단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즉각적인 휴전상태로 돌입한다. 자녀가 우리의 비무장지대이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둘의 싸움에 가장 상처를 입는 쪽은 자녀라는 걸 잘 알기에 그들이 내미는 협상에도 임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급하게 한 휴전으로 말미암아 냉랭해진 기류를 감지하면, 아이들은 갖은 아양을 떨어가며 은근슬쩍 화해와 협상을 유도하기도 했다. 때로는 내 편을, 때로는 남편 편을 또 때로는 양다리를 걸치며 늘 가정의 평화를 중재하는 전문 협상가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빠지고 난 지금은 싸운다고 한들 칼로 물 베기일 때가 더 많아졌다. 삶이란 긴 터널을 지나며 서로 친구처럼 의지하고 서로에 연민을 더 느끼며 우리가 역으로 그들의 비무장지대가 되어야 하는 숙제로 남았기 때문이다.

자녀의 결혼식 때 나는‘서로서로 자신을 버려야 하고, 서로서로 감싸주어야 하나가 된다. 서로서로 기다려주고 서로서로 보살펴야 하나가 된다. 서로서로 꽁꽁 묶여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주례 대신 시 낭송을 하며 슬며시 비무장지대를 자처했다.

그런 날 나는 걱정하며 안쓰러워하고 남편은 대견스러워하며 뿌듯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래카메라나 CCTV라도 설치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전쟁터는 떠나지만, 비무장지대 역할은 계속하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그들은 결혼이라는 험난하고 고단한 인생길에 합류하여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을 비슷하게 걸어가리라.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까운 사이가 부부요, 곁에 있어도 그리운 게 부부라는 터득하면서 한 그릇에 밥을 비벼 먹고 같은 컵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다가도 아주 사소한 일에 금방이라도 헤어질 듯 싸우며 살아가겠지. 그럴 때는 또 그들이 형성한 비무장지대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겠지.

물론 살면서 싸우지 않는 것, 이것이 최고의 결혼생활이다. 사소한 부부싸움도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부전이승(不戰而勝)이라 했다. 백전백승하더라도 피해를 보게 되므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전략이지만, 어쩌면 그보다도 최고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면 은근슬쩍 비무장지대에 기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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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미 2024-01-16 19:44:29
와우~~기발한 발상이네요
우리집 비무장지대~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