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 가는 길
녹나무 가는 길
  • 전주일보
  • 승인 2023.12.2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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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대표
김정기 대표

봄날이다. 눈부시게 푸른 날이다. 찬연한 남국의 봄이 길 위에 쏟아진다. 일본 큐슈(九州) 사가현(佐賀縣)의 다케오(武雄) 올레길. 12월 겨울 초입에, 오랜 친구 넷이 모처럼 귀한 시간을 내 걸었다.

“근데 왠지 쇠락해 보이지 않아? 제국의 몰락이랄까∼.” “아까 다케오역은 새 건물이었잖아.” “올레길 시작부터 깨끗하고, 맑은 날씨지만 저 리본처럼 쓸쓸하고 낡아 보이네” 걸으면서 내내 일본 경제몰락에 관한 대화다.

오래된 다케오 녹나무까지는 아직도 먼 길이다. 구부러지는 모퉁이. 기시다 일본 수상과 자민당 한 후보의 포스터가 나란히 눈에 띈다. “어제인가 보니 기시다 지지율이 17%로 최악이라는 단신을 읽은 거 같은데∼” “일본이 자민당 일당 독주체제가 원인인 거 같애.

거기다 눈만 뜨면 비자금 거짓말이지. 정치가 긍게 일본 열도 사회 전 부문에서 그냥 역동성이 사라져 버린 거지.” “한때 미국을 넘보던 경제 대국이, 중국에도 밀려 3위로 추락하더니 올해는 독일한테도 3위 자리를 뺏길 거 같다네. 4등으로 추락이여.” 심도있는 원인부터 진단까지 간다. 일본의 몰락은 결국 정치에 있다는 이야기다.

2024년 4월 10일. 22대 총선이다. 벌써부터 자천타천 국회의원을 갈망하는 분들이 나섰다. 카톡에 연일 “카톡 카톡∼”하며 “내가 적임자”라고 소리를 울린다. 어떤 어떤 전문가에서, 현 정부의 실정까지 힘주어 성토한다. 지역과 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상대가 실축하기를 원하는 예비후보들이 부지기수다.

국회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는 253개 지역구 중 서울과 전북의 지역구를 한 석씩 줄이는 계획으로 국회의장에게 보고했다. 아직 여야가 협상을 진행 중이지만 그대로 이행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전북 선거구 10석 꼭 지키겠습니다.” 인구 감소 지역구 의원이 언론에 일갈했다. 그냥 지키겠다는 것이다. 전북 10석이 지켜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뜻있는 전북인들은 또 무력감을 맛보아야 한다.

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서울·부산·전남·광주·강원도에서 시·군·구 분할을 허용했다. 인구 많은 선거구와 하한선에 못 미치는 선거구를 통합하고 분할 했다. 인구가 적은 광주 동구를 남구에 붙여 ‘광주 동남갑 을’로 분할한 경우도 그중 하나다.

전북에서 ‘새만금 메가시티’ 논의를 진행 중인 군산과 김제·부안을 군산·김제·부안 갑, 을로 선거구를 통합 분할 해 살리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면 군산의 신영대·김의겸 의원과 채이배 전의원, 전수미 변호사에게도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한편 김제·부안의 이원택 의원이나 다른 후보들이 쾌히 수용할지는 의문이다.

한 유권자의 외침이 또렷이 다가온다. “전북 출신 입지자라면 누구나 다하는 윤석열을 탄핵시키고 끌어내리겠다는 가장 손쉬운 구호 밖에 없습니다. 너무 식상한 거 아닌가요?” “내가 사는 지역의 핫이슈가 무엇이고, 시민들이 솔깃할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라고 마무리한다.

동의한다. 무엇보다도 ‘전북의 미래를 우선’해야 한다. 전북이 지지해 여당이 되었을 때나, 지금 야당일 때나 이리저리 치이기는 매한가지다. 우리 지역 출신의 이철승·김원기·고건·정세균·정동영 등 큰 정치인이 여야 수장이나 국회의장, 총리일 때에도 전북은 이웃 충남이나 광주·전남에 비해 이래저래 항상 눈칫밥 먹는 며느리 찬밥신세였다.

“너무나 점잖한 스타일이었지 않아. 가뜩이나 전북은 이제 마이너 집단, 소수 집단인데. 점잖하기보다는 좀 공격적인 사람들이면 좋을 거 같아.” “우리들이 태어난 60년대만 해도 전북은 전국 대비 10%를 넘었어. 근데 5%로, 이제는 3%, 2%도 겨우 턱걸이하는 거 같애.” “조만간 충북에도 추월당한다.” “글지 인구는 아직 전북이 충북보다는 많지만, 경제에서는 이미 몇 년 전에 추월당했어.”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3시간여 대화를 나누었다. 길 위의 대화다. 다케오 경기장 둘레길을 지났다. “여기는 실제 많이 낡아 보이네∼.” 12월 중순. 아직도 붉은 단풍 숲을 지나 다케오 신사에 도착했다. 대나무 길 300미터. 걷는 사이 거대한 녹나무가 눈앞에 우뚝 서 있다. 3,000년 된 녹나무다. 큰 구멍이 위아래 두 개가 뻥 뚫려있다. 승용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다.

“저 녹나무가 ‘이웃집 토토로’ 만화영화의 집이야. 착한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요정들이 사는 숲이지. 두 자매가 고양이 버스 타고 숲속의 요정들과 신비로운 세계 속에 사는 이야기인데∼” 실제 큰 구멍 속에서 요정들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처럼 진지하게 쏟아냈다.

길 위의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다. 감독은 작품을 통해 순수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동화를 그려냈다. 교훈이다. 22대 총선까지는 100여 일.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만이 3,000년 녹나무 속의 눈부신 세상을 볼 수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미당 서정주 詩)

 

#김정기 대표(前 KBS전주 편성제작국장). KBS PD. 1994년 다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시작으로 ‘지역문화’와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다. 3.1절 기획 ‘무주촌 사람들’ ‘키르기즈 아리랑’. ‘한지’ ‘’백제의 노래‘ 등 30여 편의 다큐멘터리와 ’아침 마당‘ ’6시 내고향‘ 등 TV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은 (사)천년전주한지포럼 대표로 ’한지알림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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