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 5일장
관촌 5일장
  • 김규원
  • 승인 2023.08.17 15: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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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김영숙/수필가
김영숙/수필가

여름철 관촌 장(場)은 새벽부터 시작된다. 고추 때문이다. 고추는 이미 질 좋고 맛 좋다는 명성이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소문이 나 있다. 임실 고추는 자연적 요건 때문에 껍질이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고 빛깔이 곱고 당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한국인이 제일 선호하는 매운맛을 간직한 명품 고추로 유명세를 타서 임실 장 다음으로 크게 열리는 관촌 장이 인기 있는 건 당연하다.

나는 고추 시장이 열리는 바로 옆에 산다. 그래서 나는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은 생고추에서 마른 고추가 출하되는 칠월 말부터 시월 말까지는 5일마다 열리는 시장에 새벽잠을 내주고 산다. 더 좋은 고추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상인들과 조금이라도 높은 가격에 많이 팔려는 농민들 간의 흥정 소리는 알람 시계처럼 정확하다. 한차례 시끄러운 경운기가 지나가고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흥정으로 시끌시끌할 무렵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늘 같은 시각이다.

곤히 단잠에 빠져 있는 어느 날은 짜증도 나고 화도 나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고함이라도 지를 요량으로 창문을 열지만, 어슴푸레 새벽을 열며 포대가 즐비하게 늘어선 고추 시장의 광경을 접하면 나도 모르게 말문이 닫힌다. 오히려 ‘애쓰시네요. 고추 농사는 잘되었나요? 식사는 하고 나오셨나요?’ 하고 묻는다.

고추장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정오쯤 시장에 나가본다. 고추 시장 외 다른 장터는 한산하다. 사실 집 앞에서 열리는 장이지만, 직장 생활인 특성상 운 좋게 휴일이 걸리는 날 아니면 장 구경조차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획일화되어 원하는 물건을 언제든 살 수 있는 마트가 근처에 몇 곳이나 있으니 굳이 재래시장을 이용하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별 불편을 느낄 수 없으니 시끄러운 장날이 은연중에 귀찮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장날이면 늘 손수 키운 채소들을 파는 어르신이 계신다. 마침 오늘은 고구마 줄기, 부추, 고들빼기 몇 단 그리고 생강 몇 뿌리를 가지고 나오셨다. 나는 우선 고구마 줄기를 샀다. 손님을 기다리며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겨서 파시니 나는 사다 김치만 담으면 되니 좋다. 껍질을 벗기다 보면 손톱 사이도 까맣게 물들고 손도 물들어 잘 지워지지 않는데 벗겨서 파니 까놓은 걸 세 단 샀더니 너무 더워 장사도 안되니 일찍 들어가야겠다며 호박잎 한 단과 부추 한 단을 오천 원에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야 무슨 횡재냐 싶어 후딱 사긴 했지만, 새벽부터 그것들을 손질해 오셨을 어르신의 수고를 생각하니 미안해서 괜히 고들빼기 두 단마저 떨이했다. 하지만, 오히려 어르신은 고맙다며 생강 몇 뿌리를 서비스라며 주셨다. 어르신 덕분에 나는 호박잎 쌈에 호박 대국 그리고 부추 전까지 푸짐한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모 방송국에서 가수 양희은의 푸근한 해설로 어느 재래시장을 문화의 거리로 만들며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내준 손님을 모시기 위해 상인들이 동분서주 노력하는 과정을 다룬 방송을 시청했다. 방송은 점포를 가진 사람들과 노점상들이 공존하는 시장, 문화와 시장이 접목되는 시장을 만들기 위한 상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흔적이 가득했다.

생존권은 화합과 관심에서 찾아야 한다. 내 고향 정선에도 천혜의 자연환경과 오일장을 접목해 국내 최대 관광지로 유명해진 ‘정선 오일장’이 있다. 그 예를 보더라도 재래시장이 그냥 점점 사라져가는 시장이라 안타깝게 여기기엔 아직 희망이 있다. 조금만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리고 차별화하면 충분히 활성화하는데 가능성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은이들은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는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누구나 사모님, 아가씨 대접받으며 기분 좋게 즐기는 쇼핑에 익숙하니 재래시장의 맛과 멋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조금 생소하고 불편한 재래시장의 풍경이지만, 시장에 가면 가격을 흥정하는 재미도 콩나물 한 주먹 더 얹어오는 인심이 있는데. 이제는 재래시장에서도 사용 가능한 상품권도 발행되어 현금처럼 쓸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품권은 선물용으로도 가능하다. 나도 지난 설날에 받은 상품권 선물로 제사용품을 이 오일장에서 장만했었다.

오일장, 돌아보면 어렸을 때는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때면 옷 한 벌을 얻어 입기 위하여 이십 리 길을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녔던 추억이 있는 장터다. 이른 아침 장 보러 가신 아버지가 막걸리 몇 사발로 지인들과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던 장터이다. 뉘엿뉘엿 땅거미 질 때면 한 손엔 자반고등어, 다른 한 손에 건빵 몇 봉지를 사 들고 기분 좋게 귀가하시던 추억이 가득한 장날이다. 이런 장날을 나는 운 좋게 5일마다 맞이하고 있었지만, 아무 감흥 없이 지나치는 날 많았는데 이렇듯 가끔은 특별한 날이 되기도 해서 더욱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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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 2023-08-17 23:45:18
정감 있죠 뭐니뭐니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