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별 지구가 오래 빛날 수 있게….
푸른 별 지구가 오래 빛날 수 있게….
  • 전주일보
  • 승인 2021.03.1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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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김 고 운 /수필가
김 고 운 /수필가

얼어붙었던 것이 풀려 생명으로 솟는 계절, 봄이다. 엊그제 눈이 내리고 된바람이 불더니, 봄을 데리고 오느라 요란을 떨었나 싶다. 겨우내 집콕으로 뒹군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뚝딱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봄 구경도 할 겸 일찍 집을 나섰다. 공원 산책로 길섶에 봄까치꽃이 바이올렛 별이 되어 빛을 발하고 수선화, 꽃무릇, 원추리도 한 뼘 넘게 자라 제법 태깔이 잡혔다.

봄은 언제나 성큼 다가왔다 싶으면 꿈속에 만나는 연인처럼 꽃향기에서 깨어보면 가버리고 없다. 올해는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지 않으리라고 해마다 벼르지만, 벚꽃이 피었는가 하면 또 가고 없을 것이다. 이미 벚나무에 발그레한 기운이 감도는 걸 보면 봄은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듯하다. 세상에 나오면서 다시 돌아가는 찰나를 사는 인생이니 봄처럼 활짝 피어 화창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려니 싶다.

이 멋진 계절에 마스크 뒤에 숨어 오는 봄조차 마음 놓고 맞이할 수 없는 이 황망한 나날을 어찌할 것인가. 계절은 봄이건만 사는 건 봄이 아니다. 발이 묶이고 다리도 묶이고 입이 막힌 삶에 봄인들 무얼 하겠는가? 흉노의 애첩으로 끌려가 살면서 북방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어도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던 왕소군의 한탄 지경보다 더한 우리의 봄 풍경이다.

꽃이 피었어도, 꽃을 보아도 우리 마음에 봄은 아직 저만치에 있다. 칙칙한 회색 계절을 걷어내고 푸르른 빛이 번지는 희망과 소생을 노래하고 싶은 우리의 소망은 아직도 한갓 꿈일 뿐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누군가 멱살을 잡아 흔들며 원망하고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대상조차 없다.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여 균형이 깨지면서 견디지 못한 바이러스가 진화하여 인간을 숙주로 삼았다던가? 자업자득이라는 서글픈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뭔가 구실이라도 삼아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오늘이다. 이 찬란한 봄을 두 팔 벌려 맞이하지 못하고 눈만 빼꼼히 내놓고 눈치를 살피는 현실은 봄이 아니다. 모두 거리두기로 떨쳐 보내고 가슴 깊은 곳에 생생하던 그리움마저 미세먼지 낀 하늘처럼 흐릿하게 퇴색했다.

지난겨울에 들어서면서 서울에 사는 85세 누님이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며 남은 형제들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다음주말에 가겠다고 약속하고 다른 형제들과 일정을 잡았는데, 수도권에서 집단감염사태가 일어나자 누님이 서둘러 잠잠해지면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별 수 없이 화상통화를 통해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는 여태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형제가 만나는 일조차 가로막힌 서러운 삶을 안타까움 속에 탄식만할 수는 없다. 아직 위험이 가시지 않아 멀리 떠날 수 없으면 가까운 뒷산이라도 찾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찾아온 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가까이 다가서면 없는 듯하다가 산들바람이 스칠라치면 아련히 느껴지는 매향(梅香)도 찾아 폐부 깊이 새겨 넣어야 한다. 눈에 뜨일까 몰래 숨어 피는 별꽃, 얼치기완두, 꽃마리, 봄까치꽃을 찾아 모두 카메라에 담아 그들이 떠난 뒤에도 보고 또 보고 사랑해 줄 것이다. 작아 눈에 잘 뜨이지 않아 왔다가 가는 줄도 모르게 스러지는 작은 풀꽃의 서러운 봄을 위로할 것이다.

봄 풀꽃은 단엽 꽃으로 핀다. 여러 겹으로 층층을 이룰 만큼 호사스럽지 않다. 적은 영양분으로 얼른 꽃을 피워 씨앗을 내야 한다. 금세 왔다가 가는 봄처럼 작은 꽃들도 예초기에 베이기 전에, 밟혀 스러지기 전에 재빨리 꽃을 열어 벌레를 부르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작고 조용히 피는 소박한 풀꽃의 삶은 알아주지 않아서, 보는 이가 드물어서 서럽다. 순하지만 질긴 민초(民草)같은 풀꽃이다.

인류가 스스로 묘혈을 파고 있었던 산업사회의 발전이라는 허울을 이제야 피부로 느낀다. 하루아침에 지구환경이 달라질 수 없고, 손상된 생태계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온 힘을 다하여 노력이라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되돌려놓지 못해도 후대에서는 반드시 되돌려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지구문명을 만들 수 있도록 작은 마음이라도 더해보자.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를 기억하며 지구를 되돌리는 노력에 함께 손을 얹어보자.

그런 마음이라도 지녀서 이 별을 떠나는 순간에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물려주는 푸른 별은 오래도록 푸르고 맑게 빛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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