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 간다
오월이 간다
  • 전주일보
  • 승인 2019.05.29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오월이 간다. 오월과 함께 봄이 간다. 꽃은 봄의 결정체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아름답던 온갖 꽃들은 이제 모두 저버렸다.

꽃들은 피어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다. 그런 연유로 피어날 대로 피어 절정을 이룬 만개(滿開)의 꽃잎은 오히려 시름을 자아낸다. ‘당송팔대가의 소동파는 깊은 밤 활짝 핀 해당화가 잠결에 떨어질까 촛불을 밝히며 조바심을 냈다. 반면 만고의 충절 성삼문은 막 피어난 동백꽃을 보며 반쯤 필 때가 가장 좋은 때라고 반개시호시(半開是好時)의 지혜를 노래했다.

 

갑오년 오월의 함성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물극즉반(物極則反),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극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다.

우주운행의 엄연한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속절없이 떨어진 꽃잎은 처연하기 짝이 없다. 시들고 떨어져 볼품없이 널브러진 낙화는 황홀했던 과거의 모습과 대비돼 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영락한 사람의 불행은 지금의 처지도 처지지만 영화로웠던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봄의 낙화는 가을의 결실이다. 아름다움을 떨궈버리고 치열한 생존의 길을 택한 용감한 결단이다. 그런고로 떨어진 꽃잎 위에서 생명의 함성을 듣는다.

125년 전 갑오년 전북의 오월이 그러했다. 견고한 계급사회의 봉건체제에 균열을 내고 근대의 문을 연 동학농민운동. 제폭구민·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수십만 농민이 들고일어났다. 폭정과 학정의 탐관을 척결하고자 했던 당대의 꿈은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새 세상을 꿈꾸며 쓰러진 농민군의 붉은 피는 구한말 항일의병,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쟁, 해방 후 반독재 운동의 자양분을 끊임없이 제공했다.

혁명의 전말을 반추하면 갑오년의 오월은 더할 수 없이 찬란했다. 고창 무장기포 엿새 뒤인 189451, 부안군 백산에 모여 지휘체계를 갖추고 혁명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를 표방한 혁명의 출정식, 백산대회다.

동학농민군은 이후 한 달 내내 승전을 이어갔다. 511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전남 장성 황룡강을 돌아 오월의 마지막 날인 531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출정식으로 오월을 열고 전주성 입성으로 오월을 마감했으니, 동학농민군의 갑오년 오월은 더할 수 없이 찬란한 승리의 계절이었다.

또한, 전주입성 다음날 전주천 건너편 완산칠봉에 진을 친 토벌군 초토사 홍계훈에게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전주화약을 맺어 전라도 전역 53 주 읍에 집강소를 설치했으니, 실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선보인 자치적 행정기관의 등장이자 역사의 진전이었다.

 

一名家, 一望士의 편견

 

농민군은 가을 들어 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했다. 농민군은 20만에 이르렀지만, 조직되고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울로 진격하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부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회군한 원평 구미란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았다.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 농민군 지도부는 사로잡혀 처형됐다. 녹두꽃이 지던 날 그들의 떠도는 넋 위로 파랑새의 슬픈 울음이 스쳐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육당 최남선은 30년 후인 1925년 봄 비극의 땅 전라도를 돌아본 소회를 <심춘순례>로 엮어냈다. 후백제의 왕도 전주를 옛 백제 땅 순례의 시발점으로 삼은 최남선은 오목대에 올라 만 오천의 주민에 일명가(一名家) 일망사(一望士) 없음이 예와 같음은 어찌 된 일인지라고 탄식했다.

당시는 3·1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이 민족지도자로 활동하며 친일로 돌아서기 전이었으니 그 조언은 애정의 발로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 박완서의 현실 인식은 보다 날카롭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애국투사는 수위를,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박완서 <오만과 몽상2>)’

실제 수많은 농민군이 체포돼 처형되거나 투옥됐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가정이 풍비박산되고 유랑에 나섰다. 그들의 비극은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항일과 반독재 투쟁의 주역

 

아무리 곱씹어도 최남선의 일명가 일망사운운은 전북도민을 우울하게 만든다. 과연 전북도민의 기개는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실패와 함께 꺾이고 말았는가.

실상은 정반대다.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은 전북도민의 저항정신으로 면면히 흘러 항일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주축을 이뤘다.

농민군들의 다수는 구한말 의병활동에 가담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해방 후 지금의 민주당의 뿌리를 이룬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을 창당한 중심인물들도 전북 출신이었다.

우리나라 사법의 기초를 다진 가인 김병로, 가인과 함께 사법의 사표로 존경받는 김홍섭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리며 검찰권을 정립한 화강 최대교 등 법조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들도 모두 전북에서 출생했다.

친일 논란을 빚고 있지만 국내 대표적인 사학 고려대를 설립해 인재의 산실로 가꾸고, 변질되기 전 민족지와 반독재 언론으로 주목받은 동아일보를 창간한 이도 전북 출신 인촌 김성수다. 언론사에 빛나는 반독재·유신철폐의 동아투위또한 전북 출신 기자들이 주도했다.

역사의 변곡점을 돌고 돌아 황토현 승전일이 국가지정 기념일로 지정돼 지난 511일 첫 기념식을 가졌다.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열어온 전북도민에게 주는 당연한 보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